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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Oct 15. 2024

세상에서 제일 슬픈 성적표

사람이 살면서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내 인생의 세 번의 기회가 있다면 단연코 첫 번째는 대학 입학이다. 나에게 입시는 '기적'을 몸소 체험했던 생애 첫 경험이었다. 고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3년 내내 독서실 책상 앞에 써붙여 놓고 공부했던 대학에 당당히 수시 1학기 전형으로 합격한 것이다. 원서를 쓰기 위해 담임과 상담하며 학과 상관없이 이 학교만 써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애교심(愛校心)에 불타올라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정문을 바라볼 때면

'내가 정말 이 학교에 와있구나. 이 학생들이랑 같이 공부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대학 2학년. 처음 암을 만났을 때도 무슨 감기인 것 마냥 뚝딱 치료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마음은 원하던 곳에서 공부를 하니 날아갈 것 같은데,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아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리 젊고 건강한 사람이라도 항암, 방사선과 같은 치료를 받으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체력도 전과 같을 수 없다. 예전에는 시험 기간에 하루 이틀 밤을 새도 끄떡없었는데 복학 후에는 학교만 다녀와도 골골거리면서 낮잠을 자야 했다.


그러니 할 수 없지. 작전을 바꾸는 수밖에.


시간표가 확정되는 3월 중순부터 도서관을 오가며 시험 준비를 했다. 달라진 체력 때문에 벼락치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일찍이 예습 복습을 하면서 진도를 따라갔다. '성실' 하나는 자부했던 나는 맨 앞자리를 사수하는 올 출석과 도서관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학교를 마쳤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전체 석차를 적어 내라는 기업들이 있었다. 학생지원센터에 가서 따로 석차를 적어달라고 했는데, 이게 왠 걸. 나의 석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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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가 옆에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어깨가 하늘 높이 치솟는 게 느껴졌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우리 엄마는 내가 암 진단을 받고 '제발 학교 졸업만 할 수 있게 해 달라'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나는 무사히 졸업을 했다. 그것도 과 수석으로.





나는 내 인생이 계속 탄탄대로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남들처럼 평범하게는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취업 재수를 하긴 했지만 원하는 회사에 입사했고 워라밸도 만족스러웠다. 무엇이든지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해서 달성하는 삶을 사는 중이었다.

또다시 '암'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사이 졸업도 하고 취업도 하고 연애도 하며 잘 지냈으니 다시 치료만 받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 러. 나


암시키는 그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거의 2-3년 간격으로 한 번씩 나를 찾아와 괜찮아질 만하면 또 치료하고 살만하다 싶으면 또다시 몸에 칼을 대게 만들었다. 만사가 행복하고 태생이 긍정적인 나인데, 자꾸 힘든 일이 반복되니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병 때문에 회사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고, 차선책으로 준비하던 대학원까지 무산되면서 진로와 연애, 결혼 등 앞날이 온통 캄캄했다.

속초로 내려가 요양 생활을 하며 잠시 회복세를 그리는 듯했지만, 서울로 복귀하던 해에 다시 또 투병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때의 절망감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게 몇 번째인지 한 손으로는 다 세어지지도 않았다.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이 제일 컸던 것 같다. 대학원 다음으로 생각했던 일자리를 목표로 자격증도 다 취득해 놓고 구인 공고가 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토익 점수는 원서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만기가 된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학습된 무기력이 생겼고, 마음이 바닥에 드러눕는 날이 많아졌다. 상담도 받아보고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았지만 지리멸렬하게 이어져온 상황을 한 번에 타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다가 내가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궁여지책으로 그 성적표가 떠올랐다. 욕심내본 적 없는 '1'이라는 숫자를 또박또박 적고는 담당자 도장까지 아로새긴 그때 그 성적표. 책꽂이를 뒤져 빛바랜 종이 한 장을 찾아냈다. 그리고 문구점으로 달려가 제일 고급져 보이는 액자를 사다가 정성껏 끼웠다. 책장에 책들을 옆으로 옮기고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액자를 올려놓았다. 영광스러웠던 과거였고, 열심히 살던 내 모습이 보였다.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했다. 열심히 배우고 공부도 그럭저럭 했는데, 배운 것을 써먹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나도 한 명의 사회인으로 당당하게 다시 서고 싶었고 돈도 벌고 싶었다. 내 자리를 찾는 일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일까. 늘 발목을 잡는 비루한 몸뚱이라니.


하지만 무엇보다 액자를 놓아둔 것은 어려운 시간들을 이겨내고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지금 힘들다고 포기해버리지 말자는 뜻에서였다.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뜬금없이 대학시절 성적표를 끼운 액자라니 처음에는 식구들 보기 민망하기도 했지만 일단 내 마음 회복이 우선이었다.





요즘말로 "열심히 살면 죽는다."라고 한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라는 제목의 책도 보았다.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착하게도 살았다. 본인에게 후하고 자기 연민이 강하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겠으나, 내 인생을 돌아봤을 때 그렇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암을 겪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속 깊은 곳에 깔려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인생의 유한함을 경험한 후 시간을 쪼개가며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았고, 모두 해내려고 애썼다. 그게 잘 사는 인생이라고. 후회 없이 사는 거라고 착각하면서.


조금 더 설렁설렁 살았더라면, 대충 살고 덜 노력했더라면 나는 안 아팠을까?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이사를 오면서 성적표 액자 앞에는 신혼여행 스냅사진이 끼워졌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엄치고 있었을 때 나를 꺼내준 것은 한때나마 반짝이던 과거의 조각이었다. 열심히 살아서 일군 그 시절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도 스스로를 의심하며 자책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몇 년 전 그때는 세상에서 제일 슬픈 성적표였지만 지금은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살았던 때가 있었지' 하며 꺼내볼 수 있는 흐뭇한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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