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삐는 내가 속초에 살면서 처음 사귄 친구다. 강원도 고성 천진해변에 있는 민박집 강아지로, 문만 열고 나가면 바다인 곳에서 문도 없이 살고 있다. 푸른 동해바다와 넘실거리는 파도, 부드러운 모래밭이 모두 예삐의 놀이터다.
서울이 고향인 나는 오래전에 앓았던 암 치료를 다시 하게 되면서 속초로 내려오게 되었다. 자연이 선사하는 계절감을 느끼며 오롯이 치유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가끔 외롭고 심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날도 밥을 먹고 어머니와 바닷길로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복슬복슬 하얀 털을 뽐내는 강아지가 도로를 따라 경쾌하게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동물농장> 애청자였던 우리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홀린 듯이 주차를 하고 강아지에게 다가갔다. 도도함이라고는 없는 녀석은 넉살 좋게 꼬리를 치더니 쫄래쫄래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차들이 지나갈 때면 뒤 따라오는 강아지가 걱정돼
"안으로 들어가~ 위험해."
를 외치며 이게 사람에게 하는 말인지 개랑 나누는 대화인지 모를 말들을 이어갔다. 털 찐 엉덩이를 씰룩대며 한참 우리를 따라오던 녀석은
"이제 여기서부터 큰 길이야. 나오지 마. 다시 돌아가."
라고 하자 나와 엄마를 한번 씩- 올려다보더니 정말 왔던 길로 돌아가는 가는 게 아닌가.
이렇게 예삐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바닷가 앞 그 골목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예삐를 마주쳤고, 일부러 강아지 먹이를 사서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목줄은 있었지만 늘 도롯가를 떠도는 강아지라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하루는 편의점 아주머니가 "예삐야~ 예삐야~" 하고 부르는 소리에 이름이 예삐인 것을 알게 됐다. 동네 떠돌이 개냐고 물었더니 민박집 할머니가 풀어놓고 키우는 개라고 알려주셨다.
예삐는 참 재밌는 강아지인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꼬리를 치며 반가워하고, 딱 봐서 아는 사람이거나 먹이라도 줄 것 같으면 발랑발랑 배를 보이고 누워 만져달라고 조른다. 배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이미 누워서 웃고 있으니 안 만지면 무안할 것 같아 손이 자석처럼 따라간다. 예삐에게 '앉아, 기다려, 손'은 일도 아니다. 어디서 그런 걸 다 배웠는지 어떤 때는
"손!"
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손이 나와있던 적도 여러 번. 끈기 있게 기다리는 모습은 또 얼마나 의젓한지. 미운 다섯 살 어린아이 보다 점잖은 느낌이다.
녀석의 배를 만지고 있노라면 편안한 듯 예삐가 스르르 눈을 감고 웃는데, 고개를 들면 눈앞이 온통 바다요, 손은 강아지의 부드러운 촉감으로 가득하니 천국이 따로 없다. 나의 손길에 녹아버리는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라니!
그러다 먹이를 주려고 가방으로 손이 가면 예삐는 재빨리 일어나 자세를 고쳐않고 '앉아, 기다려, 손' 쇼를 시전 한다. 중요한 건 딱 배부를 때까지만 먹고, 뒤도 안 돌아보고 쿨하게 퇴장하는 것이 포인트다. 그때는 아무리 애타게 이름을 불러도 미련 없이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
조금 짜다 싶었는지 물그릇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동네 마실을 떠나는 쿨한 강하지 예삐. 묘하게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동물임에도 절제미를 아는 녀석이 신기하기만 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외향적이었던 나는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지금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게 분명한데, 예전에 고마웠던 기억이나 오래된 추억들을 붙잡고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인간관계가 '기브 앤 테이크'는 아니라지만 마음 쓴 것이 많은 사람에게생기는 자연스러운기대감 때문에 혼자 상처받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바닷마을에 사는 이 강아지는 누군가 찾아오면 진심으로 반기고, 배가 차면 그저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를 찾아오고 떠나는 사람들에 연연하지 않았고, 함께 있는 시간에만 충실했으며 큰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그 사람을보면언제나 그랬듯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예삐에게 가장 고마웠던 점은 말 한마디 없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존재라는 것이다. 속초에 지내면서 힘든 치료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정기검진을 앞두고 혼란스러웠을 때에도 예삐에게 찾아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면 그녀는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다.
"괜찮다. 힘내라"는 소리도 않고 여느 때와 같이 손도 주고 배도 보여주고, 꼬리펠러를 돌려가며 제 할 일을 하는데, 그것이 어느 순간 사람의 백 마디 말 보다 더 큰 위로가 된다고 느껴졌다.
나는 누군가 힘들어할 때 평소와 같이 그 사람을 대하면서 들어주려 했는지. 섣부른 조언이나 힘낼 수 없는 자에게 억지로 힘을 내라고 파이팅을 불어넣지는 않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예삐는 훌륭한 강아지다. 적어도 나에게는.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에게 큰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존재라면 이 세상에 온 소명을 충분히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천진해변 구석구석을 뛰놀며 누군가에게 기쁨을 전파하고 있을 예삐.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누구에게도 말 못 했던 고민들을 너에게만은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었는데. 아무 때나 찾아가도 변함없이 거기 있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