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재발 탓에 항암제의 용량을 증량했고, 보다 공격적인 치료를 위해 난소를 보호하는 주사인 '졸라덱스'를 맞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출혈이 두 달 넘게 지속되었고 나중에는 감당이 안될 정도로 심해져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몸속에 있는 피가 한꺼번에 많이 빠져나가면서 눈도 잘 안 보이고 치아가 흔들렸다.
모든 음식은 갈아서 먹어야 했고 시야가 침침해 운전하는 것도 버거웠다. 내가 쓰는 항암제의 부작용 중에는 '방광염'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증상이 방광염인 줄 알고 여러 종류의 항생제를 번갈아 먹었고, 출혈 때문에 어려운 잠을 보충하기 위해 수면제도 복용했다. 잠을 자지 못하면 다음날 항암 부작용이 더 심해졌기 때문에 약을 먹고서라도 꼭 자야만 했다.
한꺼번에 많은 약을 복용해서일까. 늘 몽롱하고 가물가물한 상태였는데, 하루는 로션을 머리에 바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감이 밀려왔다.
'암'이라는 병이 특히 더 잔인한 이유는 자기 몸이 허물어져 가는 과정을 맨 정신으로 전부 다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 투병생활을 해왔지만 그래도 아직 젊고 어린 환자에 속했다. 병원나이는 만으로 계산되는데, 이름 옆에 항상 20세 / 28세 / 29세 / 31세 / 32세 / 35세...라고 적힌 글씨를 보고
'도대체 나는 나이를 언제 먹을까? 노년이 오기는 하나?'
하는 생각에 암담하기만 했었다. 아파도 되는 나이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 아픈 건 반칙 같았다.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아픈 게 더 힘들다고 하는데 그때는 정말 몸과 마음이 바닥을 쳤던 것 같다. 늘 항암치료가 할 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그런 부작용이라면 다시는, 정말이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고갈된 상태라 가끔 지인들과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할 때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마음속에 꾹 꾹 눌러 담아둔 서러움이 폭발해서였을까. 그런 나를 보며 친구들은 같이 울어주기도, 손 잡아주기도, 상담 선생님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본인의 어렵고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일본 유학을 준비하며 학원에서 만난 언니가 있었다. 연락도 자주 하고 나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지인이어서 편하게 만남을 이어갔다. 그날도 무언가 힘든 일들을 언니에게 털어놓다가 목놓아 엉엉 울어버렸다. 누군가를 붙잡고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언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오빠 한번 만나볼래?"
언니의 오빠는 선천적으로 신장이 좋지 않아 투석을 받다가 몇 년 전 신장 이식을 받으셨다. 암환자와 투석 환자의 치료 과정은 사뭇 다르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병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장마가 한창이었던 7월의 어느 날. 언니와 오빠를 만나기 위해 남양주로 향했다. 눈도 침침하고 날씨도 험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다과를 주문하고 어색하게 마주 앉은 우리 세 사람은 선뜻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나서야 나는
"이렇게 주말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
라고 이야기를 건넸다. 오라버니는
"어.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일단 그런 상황이었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먼저 생각했어. 나는 그래도 가족이 곁에 있고, 내가 당장 나가서 벌어야 하지 않는 상황이라 다행이라 생각했고, 치료받을 수 있는 약이 있고, 병원에 다닐 수 있고..."
오빠는 준비해 온 말들을 이어갔다. 본인도 긴 투병생활로 힘들었을 때 집 밖에도 나가지 않고 방에서만 생활하던 시간이 있다고 했다. 고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이 병으로 인해 내가 할 수 없는 일들, 내가 못 가진 것들을 헤아리는 대신 나에게 있는 부분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별 건 아니지만, 정말 힘들어서 나쁜 생각이 들 때는 매주 올라오는 웹툰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냈어. 수요일에 내가 좋아하는 웹툰이 올라오거든. 그걸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무사히 그때를 넘겼던 것 같아."
'웹툰'이라니. 너무 귀여운 발상이었다. 나는 비록 웹툰이나 만화를 즐겨 보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시련을 견디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니와 오빠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 나는 오라버니의 말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화목한 가족이 있어. 사랑하는 남자친구도 있지. 그들은 항상 나를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고,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줘. 그리고 좋은 친구들도 많아. 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에서 제일 좋은 선생님들에게 치료받고 있어. 유방암은 다행히 쓸 수 있는 약의 종류도 많고. 경제적으로 내가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야. 잘 치료받으면서 내 한 몸 낫기 위해 힘쓰기만 하면 돼.'
뇌는 우리가 가짜 웃음을 지어도 진짜 웃는 걸로 인식한다고 한다. 나는 지금 뇌를 속이고 있는 걸까, 정신 승리 중인 걸까. 집에 가는 내내 긍정회로를 무한히 돌렸다.
다소 치명적이긴 하지만 건강이 좀 취약해서 그렇지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겠다 싶었다.
나태주 시인은 <행복>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나는 돌아갈 집도 있었고, 힘들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고, 외롭고 슬플 때 부를 노래도 많았다. 당장 행복하다고 느끼지는 못할지언정 스스로를 불행의 터널에 가두지는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어둑어둑 요란한 비가 내리는 장마철이 되면 그 빗속을 뚫고 달리던 절실한 마음이 떠오른다.
이 세상에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나 못 가진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나에게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리는 게 훨씬 더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이야기해 주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