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만 남고 과정은 사라질 때

요약된 삶에 대하여

by 이연

우리는 보통 삶을 이야기할 때 마지막 장면을 먼저 꺼낸다. 잘 되었다거나, 정리되었다거나, 어쨌든 지금은 괜찮아 보인다는 말들. 그 말들은 대개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이라는 이유로 충분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과는 분명하지만,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쉽게 생략된다. 마치 남길 만한 것은 끝에 있는 것뿐이라는 듯이.

과정은 늘 번거롭다. 방향을 바꾸는 장면, 확신하지 못한 선택, 한 번쯤 무너졌던 순간들은 설명하려 들수록 길어지고, 길어질수록 요지가 흐려진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과정을 말하는 대신 결과로 대신한다. 그 편이 서로에게 편하다.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굳이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만 남은 이야기는 언제나 매끈하다. 너무 매끈해서 오히려 실제 삶과는 닮지 않는다. 실제의 과정은 대개 엉성하고, 반복적이며, 결정적이지 않은 선택들로 채워져 있다. 어떤 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어떤 선택은 선택이라기보다 그날의 한계에 가까웠다. 그런 장면들은 결과로 압축되는 순간 모두 지워진다.

사라지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그 사건을 통과하던 감각도 함께 사라진다. 망설였다는 사실, 확신이 없었다는 기억,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는 감각 같은 것들. 결과만 남은 이야기는 삶을 정돈한 듯 보이게 만들지만, 그 삶을 살아낸 사람의 체온까지 남기진 않는다.

나는 결과 중심의 이야기가 삶을 대표한다고 믿어질 때, 문제가 생긴다고 느낀다. 결과는 삶의 한 단면일 뿐인데, 우리는 종종 그것을 전부처럼 다룬다. 그러다 보면 과정에서 했던 선택들은 의미를 잃고, 설명되지 않은 시간들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취급된다.

특히 잘 견뎌낸 삶일수록 이런 오해를 더 많이 받는다. 겉으로 보기에 안정되어 보이는 상태에 이르면, 그 이전의 흔들림은 굳이 소환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굳이 다시 꺼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결과도 없었을 가능성은 좀처럼 꺼내지지 않는다.

과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평가다. 결과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빠른지, 느린지. 그 평가는 종종 삶을 이해하기보다는 비교하기 쉽게 만든다. 누구는 빨리 왔고, 누구는 돌아왔고, 누구는 아직도 과정 중이라는 말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사람이 늘 과정 중에 있다. 단지 어떤 시점의 결과가 더 잘 보일 뿐이다.

나는 요즘 결과를 묻는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지금은 어때"라는 말, "이제는 괜찮냐"는 말 앞에서. 대답할 수 있지만, 그 대답이 나의 시간을 제대로 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괜찮다는 말 안에는 너무 많은 생략이 들어 있고, 그 생략이 반복되다 보면 나 스스로도 내 과정을 가볍게 취급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능하면 결과보다 과정을 먼저 떠올리려고 한다. 잘 해냈는지보다 어떻게 지나왔는지, 무엇을 얻었는지보다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그 질문들은 화려한 대답을 허용하지 않지만, 적어도 삶을 단순화하지는 않는다.

과정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록되지 않아도 되고, 설명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스스로에게까지 사라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과만 남기고 과정을 지워버리면, 삶은 점점 요약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요약된 삶은 이해하기는 쉽지만, 오래 바라보기에는 너무 얇다.

결과는 언젠가 또 바뀐다. 그리고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이미 지나가 버린다. 다시 불러올 수 없고,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는 과정을 조금 더 신뢰해보려 한다. 결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시간들을.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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