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에
언제 말할까? 수업 시작하기 전에 할까, 수업 끝나고 할까. 그냥 분위기 봐가며 얘기하자 싶었다. 마지막 수업은 4월 4일 금요일이다. 나는 참석하지 못한다. 딸아이가 양양에서 바둑 대회에 참가하는데 끝나면 5시 30분이다. 바로 출발해서 오면 수업 시간 전에 도착은 하겠지만,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온다고 확정하기가 어렵다. 나 혼자는 오늘이 마지막 수업인 거다. 되면 오고.
한 명이 빠진다. 몸이 아프다고 했다. 둘이서 수업했다. 센터에서는 훈련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또 한 주 밀리니까. 분위기가 다르다. 코치님이 수업을 하면서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까지 진지모드였다면 오늘은 아이들을 대할 때처럼 한다. 고향이 제주라는 말도 하고, 훈련할 때 동작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개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농담도 하면서. 이렇게 웃으면서 하기는 코치님과 수업하면서는 처음이었다. 설명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해주는데 이렇게 분위기까지 좋으면, 마지막 수업을 정해놓고 이래버리면 어쩌라는 건가. 더 하고 싶은 마음 만들게 한다.
두 명이라서 미니 경기는 하지 않았다. 80분 동안 번갈아가며 뛰어다니며 일종의 지옥훈련을 했다. 숨 돌리려 하면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내가 빨리 쉬는 방법은 집중해서 발 빠르게 하는 것뿐이었다. 마지막 수업이지만 아쉬워하거나 질질 짜는 그런 모습은 없다. 3개월, 짧을 수도 있는데 그동안 많이 배웠다. 오늘 배울 내용에 맞게 스텝 훈련을 다르게 했고, 점차 강도를 높이며 훈련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마음을 담아 인사도 했다.
예측하지 않은 마지막 수업이었다. 내가 그만두거나 또는 인원 미달이라 쉬어가는 때는 있을지라도 센터에서 수업이 끝난다는 것을 말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내가 결정을 내리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끝을 맞이해야 한다.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할 때가 생각이 난다. 회사의 상황이 어려워져서 임원은 구조조정을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팀은 팀장 포함 네 명이었는데 두 명이 나갔다. 그때 팀장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곧 사람들을 내보낼 것이고, 나는 남게 되는데 미리 알고 있으라고 했다.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임신 초기였고, 아이를 낳으면 출산 휴가를 가야 하는데 업무 공백이 생기니 그 두 사람 말고 나를 내보내달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두 명의 경력직을 보내고 두 명의 신입을 뽑는다고 했다. 내가 출산휴가를 가니까 한 명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을 테다. 그들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명찰을 반납해야 했다. 그때 나간 사람이 열 명이 넘었다. 회사에 헌신했는데 그 결과가 이런 형태로 나타나 허탈해 한 직원도 있었다. 회사에 애정이 없던 직원이라 하더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 진정으로 잘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게 좋은 건지, 이렇게라도 보내어지는 게 내 삶에 득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이건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해석하고 행동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 또 있다. 언니들 세 명과 자주 가던 술집이 있다. 대구 이시아폴리스에 '해녀의 꿈'이라는 해산물 파는 식당이다. 일 년 가까이 다녔다. 원주에서 대구에 놀러 가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여기만 갔다. 다른 언니들은 평일 주말 상관없이 만나면 이곳을 갔다. 가족이 운영하는데 딸은 우리에게 언니, 우리는 사장님께 언니라 하며 지냈다. 족보가 꼬여도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데만 열중했다. 우리 네 명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할 때가 있는데 이때가 목소리가 커질 때다. 간혹이 아니라 자주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식당에서 만나면 주인이 여러 차례 왔다.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해야 했고, 적당한 때에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러다가 만난 곳이 여기다.
일부러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린다. 다른 식당에 가서 먹으며 대기하고 있어도 되는데 주구장창 한자리만 지켰다. 우리를 제외하고 마지막 손님이 가면 우리끼리 논다. 그때부터 우리는 2차가 시작되는 것이다. 저녁 일곱 시에 만나서 새벽 한시쯤에. 소리를 낮춰 음악을 틀어놓고 따라 부르기도 하고, 서로 칭찬과 도움 되는 말을 하면서 서너 시까지 논다. 재미가 있으니 우리도 이곳을 자주 갔고, 가족들도 우리가 가면 좋아했다. 일 년 가까이 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게 정리를 한다고 했다. 이전에 부동산에 내놓았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그때가 우리가 처음 갔을 때쯤이었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겠다는 주인이 나타나 계약까지 된 거다. 24년 설 연휴에 마지막으로 갔다. 우리처럼 곧 영업 종료가 된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단골손님으로 다른 날보다 더 북적거렸다.
그들이 장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보지 않는 건 아니다. 일 년 동안 각자 다른 방법으로 정을 쌓아왔다. 특히 사장님네 가족은 원주에 언니가 살고 있어 나는 원주에서 만나기도 했다. 해녀의 꿈 덕분에 해산물 맛을 알게 된 우리는 다른 해산물 집에서도 만났다. 우리가 술 마시러 갈 곳이 없어진 건 맞지만, 새로운 곳에서 만난다. 물론 다시 조용히 해달라는 부탁의 말을 들으면서.
이들 덕분에 인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만난 지 하루 만에 마치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얘기하고, 다음에 가도 기억해 줬다. 우리는 가족들의 생일이나 좋은 일을 챙겼는데 일방적인 건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에게 감동을 준 때도 있었다. 생일이면 미역국에 잡채까지 일부러 만들었으며, 우리가 책 출간 파티로 만난다는 걸 알고는 케이크도 주문했다. 특별한 날에 현수막은 기본이었으며, 혹시 외부에 일정이 있는 날에는 늦게라도 와서 얼굴을 봤다. 서로서로가 노력한 덕분에 지금까지 꾸준하게 연락도 하고 지내며 만나자고 말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사람들을 편안하고, 찾게 하는 마법이 그들에게 있는 듯했다. 기존의 나였으면 전화번호에 연락처가 저장된 상태로 두고 끝냈을 테다. 사장님네 가족들 그리고 같이 노는 언니들이 챙기는 모습에 사람들과의 관계는 이렇게 유지하는 거구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올해도 한 살이 먹고야 말았다. 태어났고, 입학을 하면 졸업을 했고, 학생 신분이 끝나면 사회생활을 해야 했다. 결혼으로 독신 생활도 끝났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신생아를 거쳐 지금까지 살아왔다. 엄마로만 사는 건 내가 바란 삶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가 없는 삶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글쓰기가 계기가 되어 생각을 바꿨다. 불만을 모두 내가 아닌 외부에 두었는데, 글을 쓰면서 나에게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책하지는 않았다. 있는 그대로 적었는데 내가 엄마라는 점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며, 엄마인 나와 나로 살아가는 나를 어떻게 구분하여 살아가는지에 따라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게 되면서, 엄마로 살아가는 지금도 순간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내가 결정을 내리고도 후회하는 때가 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결정으로 내 선택권이 없을 때가 있는데 이럴 때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바로 이런 일은 불쑥 찾아오고, 우리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못나서도, 부족해서도 아니다. 그냥 그런 일들이 살아가면서 일어날 뿐이라는 거다. 내가 잘나서 질투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닌 것처럼 그냥 나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그러니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결과들 모두 좋게 풀린 이야기다. 반대의 상황도 있다. 내가 자책하고, 매달렸을 경우이다. 나이가 들고, 이별을 하고, 도전한 일에 실패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병에 걸리기도 하고, 갑자기 돈 문제가 꼬이기도 한다. 가장 먼저 인정하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내 의지가 없었던 일에 선택권을 줄 수 있다.
그만두기 싫지만 그만둬야 하는 축구 수업에서 수용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