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치유자
고등학교 시험 기간에 엄마가 못난이사과를 많이 사오셨다. 엄마가 사과 대여섯 개를 깎아놓으면 아빠는 내 방에 놓고 가셨다. 난 사과를 먹으며 공부를 했고 형광등도 끄지 않고 잠들곤 했다. 주무시다가 중간에 깬 아빠는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꺼주셨다.
국민학교 시절에 발을 씻지 않고 잠든 적이 있었다. 아빠는 수건에 물을 묻혀서 내 발을 닦아주셨다. 발가락 사이에 낀 때도 닦아주셨다. '발을 안 씻고 자면 끕끕할텐데..'라고 혼잣말을 하시면서.
결혼하고 친정에 가면 거실에서 잘 때가 종종 있었다. 아빠는 밤 한두시에 꼭 나오셔서 이불을 덮어주셨다. 장롱에서 이불을 새로 꺼내서 덮고 있는 이불 위에 한겹더 덮어줄 때도 있었다.
난 양팔을 위로 올려 만세 자세로 잘 때가 있다. 어느날 아빠는 잠든 나를 보러오셨다가 '이렇게 자면 얼마나 불편할까'하시며 내 팔을 바르게 잡아주셨다.
부모님은 연료를 아끼느라 평소엔 보일러를 잘 틀지 않으셨다. 그러나 내가 가면 온 집안 바닥은 절절 끓어 땀이 뻘뻘 났다. 이번엔 아빠 대신 내가 일어나 보일러를 껐다.
난 깊은 잠에 빠져있었고 아빠는 나에게 사랑을 주셨다. 난 그 순간을 잠결에 알아챘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아빠의 사랑이 얼마나 더 많을까.
결혼하고 나서는 일년에 많아야 서너번 밖에 가지 않았던 친정집에서의 밤에도 아빠의 사랑은 이어졌다. 그런데 한 이 년 전부터는 아빠의 발길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아빠는 몸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그토록 사랑했던 딸이 잘 자는지 걱정해줄만큼 건강하지 않으셨다. 그대신 내가 아빠가 잘 주무시는지 숨은 쉬고 있는지 내 숨을 죽여 소리를 듣곤 했다.
아빠가 돌아가신지 44일 째 날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아빠를 위해 기도하리라 생각했는데 난 자주 아빠를 잊어버린다. 아빠의 죽음이 여전히 현실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