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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책장 Nov 30. 2022

슬픔을 마주 보는 정직한 장소

feat. 고경애 작가, 옆모습

새벽 여섯 시. 고요한 시간. 옛 노래가 생각나 스트리밍을 검색했다.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이 부른 [백일몽].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나는 옛날 노래들을 참 좋아한다. 이제는 황혼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세 분의 청춘의 노래를 들으며 사랑도 미움도 정말 한 순간의 꿈 백일몽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감정을 통과한 후의 잔잔함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그렇게 아련하고 홀가분하다.

  

4년 전, 1년 전.

내게는 크게 상처가 된 일들이 두어 개 있었다.

그 일들은 문득문득 고단한 날이나 외로운 날이면 울음처럼 몰려와 나를 괴롭혔다. 살면서 그런 타격은 피해 갈 수 없는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우울감이 찾아올 때마다 털어내며 묵묵히 걸어가려 노력했다. 어쩌면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겠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누구나 그런 트라우마는 하나씩 가지고 사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몇 해 동안 나는 병들어 있었다. 나를 아는 지인들은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잘 살았다. 매일 산책을 하고, 읽고 쓰고 일을 하고, 발레를 하고, 집을 정돈하고 요리를 하며 소소한 기쁨을 자주 누렸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 해결되지 않고 곪아있는 부분들은 예전의 구김 없던 나의 밝은 성품으로 나를 돌려놓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고단했다. 독립적이고 혼자 있는 시간이 중요한 나였지만 해결되지 않는 고독감이 자주 밀려왔다. 그러는 동안도 몰랐다. 내가 곪아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일이 상처였는지 알고 있으나 그 상처의 근원에 무엇이 나를 계속 넘어뜨리는지 그땐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다. 내 슬픔의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알게 된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매일의 일상처럼 그날도 나는 산책을 나갔다. 걷다가, 걷다가 문득 알았다. 내 속에 곪아있던 염증이 깊은 분노와 미움이라는 걸. 내가 가장 무력했던 시간에 나를 상처 줬던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분노와 수치심이 오랫동안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나는 이 나이 되도록 미움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미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금기시한 탓에 내가 누군가를 깊이 미워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다. 그냥 내 상처가 깊다고만 생각했다. 그 상처의 밑바닥에 그렇게 큰 미움과 분노의 덩어리가 있는 줄 몰랐다. 그것이 염증이 되어 치유되지 못한 채 곪아서 내 깊은 곳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그것을 마주하니 알 것 같았다. 왜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었는지.


다시 새벽 여섯 시. 나는 한 꺼풀 한 꺼풀 내 마음속의 고단한 짐들을 벗었다. 신뢰하는 공간. 내가 정성껏 가꾸어 온 사랑하는 나의 집이다. 나로 있을 수 있는 장소에서 마음의 갑옷처럼 무장하던 것들을 하나씩 벗어 놓는다. 무장을 해제하니 그 속에 있는 건 나도 몰랐던 깊은 슬픔. 그 슬픔의 근원에 있는 덩어리 진 미움과 분노.

잘 다독여 보내주고 싶었다. 어렵지 않았다. 나도 몰랐기 때문에 보내지 못했던 아이. 내가 가장 무력해진 시절에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 내 상처는 그들의 문제와 별개라는 게 보였다. 그건 그들의 몫. 그러나 병든 미움을 내 속에 염증처럼 가지고 있다면 나는 나아갈 수 없어. 그것은 오롯이 내 몫, 나의 문제였으니 나의 상처와 미움과 분노를 잘 다독여 보내주는 것만 남았다.

잘 가라. 고운 뒷모습으로 날아가렴.


고경애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다.

따뜻한 가정을 가꾸며 집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그녀. 그 속에 담긴 여인의 나체를 본다. 외설스럽지도 처연하지도 않았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그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시작점에 선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다. 내 마음에 어떠한 허영도 피해의식도 남아있지 않고 벗은 기분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가벼운 마음이 홀가분하고 따뜻하다. 생일을 다시 얻은 기분. 예전의 구김 없던 나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원했던 일들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걸 보고 싶다. 오래 소망하고 기다렸던 일들을 맞이하고 싶다. 슬픔과 분노, 미움을 지나 무력해진 시간 동안 걸치고 있던 연민을 벗고 세상을 향해 가벼워진 모습으로 마주 선다. 괜찮은 척 감춰야 할 갑옷은 이제 필요 없다. 그런 게 없어도 더 이상 무력하지 않다.


슬프게도 이 그림은 이태원 참사 애도 시기에 만났다. 희생자 가족의 마음을 안아본다.

염증처럼 남겨질 각자의 슬픔. 그들의 슬픔을 잘 보내줄 수 있는 날까지 마음으로 그들을 안아주고 싶다. 슬픈 고독 속에 병들지 않도록. 



고경애 작가, 옆모습, 116.8 x 91.0cm, 2022


<참고>


<백일몽>, 윤형주, 조영남, 김세환

고경애, <유영하는 삶의 조각>, 갤러리 로얄 전시, 2022. 10.6 -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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