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
나는 홍익대학교 실내건축학과를 졸업했고, 서울대 건축대학원 석사과정을 밟다 중퇴한 그래도 나름 한국의 괜찮은 대학을 경험해 본 사람이다. 게다가 서울 중심부가 아닌 수도권 어느 한 지역의 공립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그렇게 대학까지 한국스럽게 다닌, 일반적인 한국인의 루트를 밟은 나는, 이곳에 와서 눈에 띄게 딸리는 서양애들의 수업 이해도와 준비방식에 매우 놀랐었고, LSE가 이 정도면 대체 다른 대학들은 얼마나 수준이 떨어진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학생들 수준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도 우리나라 교육은 왜 그렇게 비난을 받으며 우리나라 대학들은 왜 순위권에 들지 못하는가에 대한 안타까움도 느꼈다.
사실 대학 순위는, 학생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열정적인가가 아닌, 교수진의 연구실력과 교수진의 수준에 따라 좌우되기에, 그 점에선 LSE의 교수진들이 뛰어날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연구대상 자체에 대한 페널티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곳에 나와 보니, 작은 나라 한국은 거의 없는 나라였다. 아시아는 오직 중국과 인도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고, 분명 한국은 저 가설과 이론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데도 어떤 학술지도 그 지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곳의 한국 교수님은 이런 서구화된 흐름을 동양권으로 가져오고자 꿋꿋이 한국을 연구하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그의 연구에 ‘중국’이 빠진다면 과연 한국을 연구하는 것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싶은 정도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상황에 대해 연구주제를 잡는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당연히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세계는, 한국을 궁금해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오늘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조금은 아픈 이야기이지만 교수들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내가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뛰쳐나온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예상이 되겠지만, 노예처럼 부려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입학하기 전부터 연구실에 불려 가 일을 해야 했고, 그에 대한 대가도 받지 못했다. 허리가 아파서 입원하고 쉬고 있는 나에게 업무를 시키려 전화하는 교수의 태도에 질려 한 학기도 마치지 않고 나와 공무원시험을 보았다. 내가 버텼더라면, 나의 첫 시작급수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내게 한국의 교수란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교수는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입학하자마자 학생들은 자신의 Academic mentor가 될 교수를 지정받고 그 Mentor는 이 학생이 한 학기의 과제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확인하고 도움을 줄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는 Office hour를 통해 상담을 요청할 수 있다. 이 Office hour는 어플을 통해 교수의 이름을 검색하고 교수가 열어놓은 Time slot을 예약하여 이용하는 방식인데 꼭 나의 Mentor가 아니더라도 모든 교수와 면담을 할 수 있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교수가 열어놓은 Time slot에 예약해 사무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내가 듣고 있는 수업이 이해가 가지 않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Office hour를 이용하여 질문하고 상담을 할 수 있는 제도이다.
오티 때부터 어떤 어려움이 있다면 Office hour를 이용해라 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나로서는 그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학과 사무실 조교한테도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것이 한국의 분위기인데 교수한테 뭘 이야기하고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 수업의 세미나 방식이 나를 힘들게 했고, 말이 딸려 아이들의 흐름에 자유롭게 끼어서 대화하기 어려운 나로서는 아이들이 하는 대로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친구에게 어려움을 털어놓으니 “교수에게 얘기해 봐”라는 조언을 했다. 나는 한국의 교수들을 떠올리며 교수가 그런 나의 질문에 오히려 기분 나빠할 것이라 생각해 주저되었지만 내 친구는 뭐 어차피 1년 뒤에 안 볼사이 아니냐며 그냥 얘기해 보라고 했다.
용기를 내어 Office hour를 잡았고, 교수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는 영어가 second language이고, 또 난 해외경험도 없다. 30년간 한국어만 사용해 오던 나에게 영어로 무작위로 대화가 흘러가는 식으로 진행되는 세미나에서 활발히 참여하는 것은 조금 어렵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참여하는 것이 나에게 좋을지 고민이다."
솔직히 나는 큰 기대가 없었고, 그저 뭐 나에게 노력의 방향이나 알려주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매우 놀라웠다.
"알려줘서 고맙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다고 네가 내 세미나에서 듣고만 있고 싶지 않아서 나를 찾아온 것일 테니 내가 네가 말하기 편한 구조로 세미나를 운영해 보겠다. 다수가 함께 말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2-3명이서 이야기한다면 너도 참여하기 쉬울 테니 매 세미나 시작 전에 2-3명씩 짝을 지어 리딩에 대해 이야기하고 흥미로운 점을 모두 앞에서 이야기하게 하는 시간을 넣어보겠다.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인종 간에 차별 없이 잘 섞여 앉게 해 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내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겠다."
본투비 영국인인 이 교수가 나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이해했고, 나를 위해 수업의 방식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준다면 나는 너무 고맙다. 잘 참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자리는 다른 애들이 불편해한다면 굳이 섞지 않으셔도 된다."
"그래 한번 보자. 다시 한번 이렇게 이야기해 줘서 너무 고맙다. 내가 수업을 운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렇게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도움을 받을 수 있구나, 교수들은 나를 도와주기 위해 존재하는구나'라는 생각에 감사하고 든든했다.
한국의 교수들이었다면, 이런 대답이 나왔을까?
나쁜 버전으로는: 나한테 뭐 어쩌라는 건데, 지금 내 수업이 문제가 있다는 거야?
착한 버전으로는: 어려운 건 알겠지만 뭐 좀 적극적으로 하려고 노력해 봐, 정도 아니었을까.
Office hour는 한 학생당 일주일에 한 교수에게 15분~30분 정도 이용할 수 있는데 교수들은 일주일에 적게는 하루, 많게는 이틀 정도의 시간을 Office hour용 시간으로 내놓고 원하는 학생들이 많다면 더 많은 시간을 기꺼이 할애한다. 내가 이후 여러 교수에게 Office hour를 신청할 때마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방에서 나오지 못한 채 릴레이로 들어오는 학생들을 맞이해야 했고 그 긴 시간 동안 내리 밀려들어오는 학생들을 응대하는 교수실은 말 그대로 끝나지 않는 민원지옥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피곤한 내색 하나 없이 언제나 "내가 뭘 도와줄까?"라고 시작하는 이 교수들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 교수들은 이런 제도를 학생들을 위해 도입하자고 해도 자기들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반대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