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릴라 뮤지컬을 보며 아빠를 만나다.
29개월 아이 이야기
어린이집 엄마들과 티타임 중 아이와 <뮤지컬 고릴라>를 보고 온 이야기를 듣게 됐다.
"얼마 전에 전 하은이랑 아기상어 영화를 보러 갔는데 아이가 집중을 못해서 30분도 못 있다가 나왔거든요. 깜깜하다. 시끄럽다 그래서요. 뮤지컬 볼 때 아이는 괜찮았어요?"
"네. 너무 집중해서 잘 봤어요. 영화는 아직 29개월 아기가 보기에는 이를 거예요. 뮤지컬은 영상도 나오고 음악도 나오고 가까이서 보는 거라 그런지 잘 보더라고요."
"아. 그럼 저도 한번 가봐야겠네요."
"네. 그리고 보러 가기 전에 꼭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 책을 읽어주고 가요. 그래야 아이가 더 집중할 수 있어요."
난 바로 인근 도서관에 가서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 책을 빌렸다. 책을 읽어보니 초등학생 한나가 아빠와 동물원에 가고 싶지만 바쁜 아빠는 같이 가지 못하고 대신 고릴라가 같이 놀아주는 내용이었다. 딸아이가 좋아할까 하고 아이에게 책을 읽어줬다. 아이는 다행히 좋아하며
"엄마. 또 읽어줘"라며 흥미를 보였다. 확실히 고릴라가 나오니 더욱 좋아하는 듯했다.
공연은 어린이대공원 안에 있는 상상나라극장에서 평일 오후 2시와 5시 공연이 있었다. 주말은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 평일 공연을 예매하고 갔다. 평일 공연이라 그런지 맨 앞줄도 자리가 있었다. 블로그에 보니 맨 앞자리 중앙이나 중앙 통로 쪽에 앉아야 좋다고 돼 있어 고민 없이 맨 앞자리를 예매했다.(예매는 인터파크에서 해야 앞자리 예매가 가능합니다.) 공연장은 아담한 소극장 크기였고 무대도 크지 않았다. 무대 벽면은 전체 영상이 나오고 있었고 앤서니브라운 그림책에서 본 익숙한 그림들이 영상에 나왔다.
조금 있다 한나와 아빠가 등장했다. 아빠는 바쁘지만 매우 다정했다. 난 그림책을 보며 바빠서 계속 "나중에~"를 외치는 아빠라 무뚝뚝하게 상상했는데 뮤지컬에서 아빠는 바쁘지만 매우 다정한 분이었다. 한나는 성인 배우가 연기해서 초등학생 느낌은 없었지만 어린이 연기를 잘해서 그런가어린아이로 보는데 손색이 없었다. 뮤지컬 곡과 영상도 좋고 책과 줄거리도 동일해서 그런지 아이는 집중하며 잘 봤다.
공연 중간에 고릴라를 좋아하는 한나가 수첩에 그린 고릴라 그림을 찢어서 관객석으로 왔다. 그리고 하은이 및 여러 아이들에게 그림을 줬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아이는 얼떨결에 한나에게 고릴라 그림을 받았고 나 역시 아이가 특별한 체험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시간이 지나니 아이는 조금씩 지치면서 집중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엄마. 나가고 싶어."
"조금만 기다려. 이제 고릴라 나올 거야."
아이는 고릴라가 나온다는 말에 참으며 기다렸다. 얼마 후 고릴라가 등장했다.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다시 공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고릴라가 나오면서 이야기는 흥미로워졌다. 아빠 대신 한나는 고릴라와 영화도 보고 춤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같이 놀다가 놀이시간도 끝나고 고릴라가 돌아가는 장면이 나왔다. 그러면서 둘이 함께 했던 그림책 장면이 영상으로 나왔다. 그때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지?'
눈물이 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한데 주변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만 운 게 아니었구나.'
아이들은 고릴라와 한나를 신기한 눈으로 보며 즐거워했지만 아이들과 같이 온 어른들은 다른 이유로 울고 있었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 한나가 되어 그 시절 아빠와 함께 한 시간을 만난 것이다. 갑자기 아빠가 생각났다. 많은 걸 갖고 있진 않았지만 사랑만큼은 무한이 줬던 우리 아빠. 그렇게 한참을 공연이 끝나도 나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하은이에게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 갔던 공연에서 오히려 내가 어린 시절 나를 만난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하은이가 물었다.
"엄마. 그런데 왜 고릴라랑 같이 가?"
"응. 아빠는 회사 갔잖아. 아빠는 바쁘고. 그래서 고릴라가 대신 간 거야."
"응. 그런데 왜 고릴라랑 같이 가?"
"응. 아빠는 바쁘니깐. 일을 해야 돼서 한나언니랑 못 놀아주거든."
"응. 그런데 왜 고릴라랑 같이 가?"
"......"
아무래도 하은이는 아빠가 있는데 아빠랑은 안 놀고 고릴라랑 노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 줘도 이해가 안 가니 계속 질문을 반복하는 듯했다.
다음날 어린이집 하원하는데 선생님이 그러신다.
"하은이가 어제 뮤지컬이 재밌었나 봐요. 고릴라가 여기서도 나오고 저기서도 나온다고 그러더라고요"라고 하시며 웃으신다. 아이가 추억을 만든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나 역시 오랜만에 참 감명 깊은 작품을 만난 것 같다. 나도 하은이에게 고릴라 같은 부모가 돼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