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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Oct 20. 2023

가을 걷기

상상농담 29. 이삭 레비탄 <가을날, 소콜니키>

  봄이 빛의 걸음으로 나날이 흙을 깨운다면 가을은 척후병의 눈빛으로 단번에 사태를 장악합니다. 조르주 쇠라가 봄이 다가오듯 '색이 사물을 조각하는 법'을 보여주었다면 이삭 레비탄은 가을이 폭발하듯 '색이 감정을 염색하는 풍경'을 보여줍니다. 레비탄의 캔버스에는 가을이 미사일처럼 수류탄처럼 터집니다. 가을에 맞아 부서지고 으깨진 감정들이 캔버스에 떨어져 물듭니다. 



이삭 레비탄 <가을날, 소콜니키, 1879>


  1879년 여름, 마른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고 지독한 무더위가 지나갔습니다. 열아홉 살이던 이삭 레비탄(Левитан, Исаак, 1860~1900)은 모스크바에서 쫓겨나 살티코프카로 추방되었습니다. 1879년 5월에 있은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사건 이후, 유대인의 대도시 거주가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지붕 없는 역사(驛舍) 의자에서 밤을 지새울 만큼 어려웠던 그는 형제들과 하릴없이 우울에 갇혔습니다. 붓도 물감도 없이 그는 끔찍한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그를 삶이 연민했을까요? 레비탄의 우수 어린 얼굴에 넋을 놓았을까요? 레비탄의 그림을 열애했던 귀족들이 모스크바를 향해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그 해 가을 어디쯤, 다시 모스크바에 토해졌습니다. 그 처연했던 계절을 그린 작품이 <가을날, 소콜니키, 1879>입니다. 



  흐린 초가을입니다. 좁게 난 하늘과 벽처럼 둘러싼 소나무는 을씨년스럽습니다. 소나무의 높은 가지부터 조금씩 물들인 가을이 낮은 나무에 노랗게 폭삭 주저앉았습니다. 아마 가끔씩 감기든 바람이 콜록거릴 테지요. 시 한 소절이 굴러올 만한 너비의 숲 길엔 노란 낙엽이 정처 없습니다. 그 길 위로 한 여인이 조용히 걸어옵니다. 굴러온 시구를 매단 듯 그녀의 치마는 어둡고 무겁고 조용합니다. 가을은 저 숲길 끝에서부터 걸어 나와 이제 그녀와 함께 더 먼 곳으로 가려나 봅니다. 



   레비탄의 풍경엔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드문 예외지요. 러시아 무드 풍경화의 절대지존인 이삭 레비탄은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 유대인 장학생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회 배려자'같은 것이지요. 학교에서 만난 그의 친구 니콜라이 체홉은 그의 재능을 아꼈고 그의 마음씀에 동정했으며 그의 형편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니콜라이가 레비탄을 위로하고자 그의 여동생을 그렸다고 합니다. 레비탄의 마음에 그녀가 있었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만 둘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그녀의 어둡고 무겁고 조용한 치맛자락과 함께 먼 가을 속으로 떠났습니다. 



          10월   -오세영-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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