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노라 Nov 14. 2023

일상의 달인

상상농담 32. 피에르 보나르 <조찬실-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식당>

  오랜만에, 여러 날 유리알을 닦지 않은 안경을 끼고 정원을 바라본 풍경일 테지요. 사물은 흐릿하고 제 자리를 슬쩍 비껴 나 있습니다. 얌전한 빛이 기웃대는 아늑한 세상입니다. 실내 테이블도, 바깥 정원의 나무도, 의자도, 귀퉁이에 선 여인도 누구랄 게 없이 빛의 간지럼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고 있습니다. 조금 전, 간질간질한 연보라 잎에 놀란 화가가 붓을 재빨리 움직여 나무랑 의자에게 "여기 잠깐 있어."라며 허둥지둥 수습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는 정원으로 빛을 마중 나가려는 주전자와 접시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휘고 고른 창틀도 세웠습니다. 그 바람에 커튼은 세상을 가려야 할지, 열어야 할지 고민하네요. 


피에르 보나르 <조찬실-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식당, 1930~31>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 <조찬실-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식당, 1930~31>의 구김 없는 화면 속, 친밀한 아침을 보세요. 화가에게 있어 빵이나 포도나 우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네요. 오히려 사물들의 다붓한 색이 빛과 함께 무대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빛이 사물의 가장자리에서 서로 침투하고 어우러지는 찰나의 다정함이 소박한 스트라이프 무늬 테이블보 위에 어우러집니다. 흰색의 다양한 얼굴이 드러나도록 고심한 흔적도 역력합니다. 그는 마른 붓으로 살살 문질러 색의 가볍고 마닐마닐한 느낌을 살렸군요. 색에 부딪친 빛의 파동에 공간이 공명하면서도 시끄럽지 않도록 능숙하게 통제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볼까요. 접시와 작은 주전자, 커피 잔들의 그늘은 흐트러지는 형태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또 왼쪽과 오른쪽, 각도가 다른 원근을 시도하여 사물이 프레임 바깥으로 튀어나오려는 듯한 자유분방한 표현을 시도했습니다. 수다스런 빛 속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이 고요한 식당은 운동과 침묵이 한자리에 머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피에르 보나르는 일상적인 사물과 정경, 가족의 모습을 소재로 소박한 생활감정을 표현하는 앵티미즘(Intimisme)의 대표 앵티미스트입니다. 그가 속했던 나비파의 한 특징이기도 하지요. 그는 주전자와 접시, 생선구이와 고양이 등 아주 일상적인 대상을 통해 일찍이 누구도 시도한 바 없는 위대한 도전을 했습니다. 


  회화의 역사에 있어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찬란했던 신화는 근대의 기차를 타고 기품 있게 올림푸스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었던 시민들의 시대가 왔습니다. 회화는 압생트를 마시며 타히티섬을 순례했고 혁명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항상 미술과 미술가들은 특별하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사건을 다루었지요. 피에르 보나르에 이르러서야 회화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었고, 집게발이 달린 욕조에서 목욕을 했으며, 과일과 치즈를 올린 식탁에서 식사했습니다. 드디어 일상이 무대의 배우이고 주제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보나르에게 있어 색은 설명 너머에 있었습니다. 그는 색상표를 샅샅이 뒤져 자신이 보는 세상, 느끼는 감정을 찾았습니다. 세상을 속없이 받아쓰던 색은 이제 뜨겁고 차가운 그만의 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상파와도 야수파와도 달랐지요. 인상파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빛'이었다면 보나르는 '색'이었고 야수파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색'이었다면 보나르는 '일상'이었습니다. 



  급행열차를 타고 겨울이 일상의 역에 내렸습니다. 차갑고 흰 망토를 둘렀네요. 채 단풍이 들지 못한 잎들도, 자동차 보넷 위에서 몸을 덥히던 고양이도 망토 속으로 사라집니다. 남아있는 건 겨울과 오늘!



PS : 요즘 분위기와 딱 어울리는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입니다. 스테판 하우저 연주예요.



  

작가의 이전글 빼빼로와 포도주가 있는 겨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