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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민서 Dec 23. 2020

사람은 술에만 취하지 않음을

BTK와의 회고록


 그날은 아침부터 뭔가 이상했다.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면 만나는 사람과 목적에 따라 입을 옷을 전날 미리 정해놓는 버릇이 있는데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상하다, 캐주얼, 페미닌, 세미 정장 등 대충 그림이 그려지던데….’ 결국 평소에 즐겨 입는 브라운 색감의 옷을 여러 겹 걸쳐 입고 짐을 챙겼다. 나가려는 순간 무엇을 신을지 한 번 더 망설여졌다. 보통은 5-7cm 정도의 구두를 신곤 했는데, 이날은 이상하게도 평소에 신는 1cm의 단화가 끌리더라. ‘뭐 별일 있겠어.’ 싶은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별다방에서 아메리카노와 핫초코를 사 들고 약속 장소인 강남역 10번 출구로 향했다. 왠지 우리는 출구 위가 아닌 아래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면식도 없던 사이지만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수록 ‘내 약속 상대가 저 사람이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바쁘게 오가는 발걸음 사이 벽에 기댄 채 멈춰있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으니까. 그런데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상체가 보여야 하는데 왜 계속 다리만 보이는 건지. 뭔가 이상함을 인지할 때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내 정수리 30cm 정도 위에서. 그때 생각했다. ‘아, 구두 신을걸.’






 낯가림이 심한 내 상태를 대강 눈치챘는지 그는 먼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는지, 날이 춥지는 않았는지, 짐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다행히도 목적지와 거리가 가까운 탓에 어색한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눈높이가 대강 맞더라. 이유는 알 것 같으나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노트와 펜을 꺼내 들다 우연히 그가 내려놓은 이북리더기에서 도덕경을 보게 되었다. ‘도덕경, 내가 아는 그 도덕경?’ 내 주변에서 도덕경을 읽거나 들고 다닌 사람은 ‘논어와 21세기’ 강의를 담당한 교수님밖에 없었는데. 그때부터 ‘이 사람 대체 뭐지?’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만나기 전에 가벼운 이력서라며 링크 하나를 전송해줬다. 비전공자가 보기에는 엄청난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력서였기에, 혹시나 싶어 그 이력서를 전공자에게 보여줬다. 단시간의 침묵 후 ‘사람이야?’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준비 중인 사업 소개서도 함께 보내줬는데, 글에서도 숨길 수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뚜렷한 방향성에서 이미 그의 역량과 성향이 묻어나더라. 이쯤 되니 내 머릿속에 남은 의문점은 단 하나, ‘대체 이런 사람이 왜 나를 만나고자 했을까?’. 이건 내가 지나친 겸손을 떤다거나 스스로 평가절하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시간의 중요성을 잘 아는 나로서는 ‘이 사람이 본인의 시간을 내게 투자한다’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낯가림도 상당히 심하고, 처음 보는 사람과 친근하게 대화하는 걸 어려워하는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가까운 지인에게도 잘하지 않던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건 아마 그 역시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내게 기꺼이 들려주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 나는 누군가가 ‘아팠다’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얘기를 타인에게 담담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건, 스스로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괜찮다며 오히려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고난과 역경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그 흔해빠진 명언이 생각난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성공에 대한 정의는 모두 다르겠지만, 그 성공이 ‘자립, 성찰, 자신에 대한 신뢰, 가치관 형성’ 따위를 의미한다면 이 말은 그를 위해 존재한다 해도 무방했다. 어느새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의문은 그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감으로 변모했다.



본격적인 대화 시작 전에, 그가 휴지 가지러 자리 비운 사이에 찍은 커피 두 잔. 왜 찍었을까..?



 14시에 시작한 만남은 20시를 훌쩍 넘겨서야 막을 내렸다. 장장 여섯 시간 동안 그란데 사이즈 음료를 하나씩 비워내며 자리 한 번 비우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솔직히 방광 터지는 줄 알았다. 블록체인 관련 논문이나 여러 기업의 백서에서 접했던 내용보다 훨씬 상세하면서도 직관적인 설명을 한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을 줄이야. 이는 그의 언변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의 말 뒤편에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던 탓일 테다.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개념, 그로부터 발생하는 모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과 이 기술을 세상에 이롭게 활용할 방법까지. 그는 대화 도중 이런 말들을 종종 사용하곤 했다.


“저는 알고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본질이 명확하고, 역사가 그래왔고, 흐름이 그러한걸요.
자신이 전문가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어요, 학위 지위 뭐 이런 거 다 떼고.”


 다소 허세 가득해 보이는  말에 태클 하나   없었던 이유는,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의 말에는 명확한 근거와 힘이 있었고, 본인이  말을 행동으로 증명해냈는데 뭐가  필요하겠는가.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던 이유  하나는, 관심사가 비단 IT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은 플라톤의 사상이 너무 좋다며 눈을 반짝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 세상에, 블록체인 얘기하다가 고대 그리스 이데아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면서 저렇게도 즐거워하는 사람이 존재하다니. 그를 보면서 ‘Techne 저런 사람을 의미하겠구나싶었다. 어쩌면 그는 전생에 진짜 플라톤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예술을 뜻하는 Art의 기원은 라틴어 Ars(아르스)인데, 이 Ars의 기원은 그리스어 Techne(테크네)라고 한다. 이 Techne는 지금의 Technic의 기원이니 Techne는 '예술과 기술은 원래 하나였다' 뭐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달까.






 자연스럽게 나는 공부했던 것들을 그에게 물어봤다. ‘S는 뭐라고 자랑하던데, F는 이 이유로 안 된다고 하던데, K는 자신이 E보다 더 낫다고 하던데’. 내 맥락 없는 질문에도 그는 바로 그것이 Scam이라 답하며 조목조목 설명해줬다. 물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가 어느 부분을 정확히 모르고 있음을 바로 인지하고 그 부분부터 짚고 설명해주는 모습에 ‘이게 전문가가 아니면 뭐겠어’ 싶은 생각도 들더라. 뭐랄까, 기초공사가 탄탄한 하나의 건축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형이상학적이면서 완벽한 형태의 건축물을. 예를 들자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외관은 반듯하게 대칭적인데 내부는 형형색색의 다채로움을 지닌 사그라다 파밀리아.



 그는 인적자원을 바라보는 눈도 남달랐다. 사실 경영을 전공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분야는 HR, Human Resourcement였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율을 내야 하는 '자원'과 '인간'의 존엄성을 같이 고려해야 하는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분야. 그는 이 부분에서 단 한 번도 ‘육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상하 관계에서 누군가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미처 알지 못했던 재능을 인지하게 해주고 이를 더 발전시키도록 돕는 과정 자체가 성공이라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론적이고 뻔한 그런 리더십 말고, 정말 그룹과 같이 성장할 수밖에 없는 그런 리더의 자질을 갖췄달까.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다방면으로 완벽하게 성장할 수 있지? 하긴, 그는 내게 '민서 님의 업(業)은 무엇인가요, 민서 님이 생각하는 정의(正義)란 무엇이죠?'라고 물어오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 이후로 업을 논한 사람은, 그것도 내 동년배에서는 처음이었다. 이쯤 되니 별로 놀랍지도 않더라.






 그는 내 표정과 리액션이 풍부해서 재밌다고 했다.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나오는 풍부한 리액션은 가식이 섞일 수밖에 없는데 이건 뭐 거의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였달까? 몇 순간 눈물을 참지 못한 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저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제정신이 아닌데?’라는 내 말에 그는 ‘취한 거예요.’라고 답했다. 사람은 술에만 취하지 않는다며. 그래, 뭔가 단단히 취하긴 했던 모양이다. 새로운 세상에, 낯설고도 친숙한 분위기에, 신기하고 놀라운 사람에.


 충분히 실례되는 행동이었지만 나는 감히 그를 대견스러워했다. 아니 알고 지낸 지 하루도 안 됐고 힘들 때 도와준 것도 없는, 대견스러워할 자격조차 없는 타인인데도 그저 대견했다. 그 외롭고 괴로웠을 순간들을 혼자 버티고, 고뇌하고, 성찰하며 인간에 대한 혐오를 관심과 사랑으로 돌릴 수 있었다는 게 어찌나 놀랍던지. 그는 자신이 완벽한 타자가 되어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다고 했다.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 느껴진다더라. 사람은 각자만의 스토리가 있으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부분도 다른데 거기서 배울 점을 찾아낼 수 있다고. 그러니 이 세상은 살아있는 도서관과 같다고. 알고, 깨닫고, 인지하는 존재. 예술과 기술을 모두 함유할 수 있는 존재. 그는 이데아이자 테크네 그 자체였다.






1. 그의 말에는 신뢰할 수밖에 없는 힘이 실려있다.
2. 그 신뢰는 어떤 것으로든 -과정, 결과, 능력 등- 입증할 수 있다.
3. 사회 전반부의 다양한 영역을 하나로 묶어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4. 대상이 어떤 것이든 그 본질적인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5.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내는 본인만의 기준을 갖고 있다.
6. 성장과 행복에 대해 부단히 고민하고 그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7.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융합적인 인재다.


 내가 지금까지 회상한 이 사람의 학력은 고졸이다. 나이도 나보다 두 살 어리다. 그런데 다룰 줄 아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수는 세기도 힘들고 경력을 읊기는 더더욱 힘들며, 세상의 본질과 흐름을 명쾌하게 꿰뚫고 있다. 그뿐이겠는가. 도덕경을 넘어 코란도 섭렵했고, 주변의 타인 혹은 인재를 도울 생각을 하며 리더의 위치에서 늘 배우고자 하는 자세까지 겸비했다. 대한민국에 뿌리 깊게 퍼진 온갖 고정관념은 다 깨고 다니는 이 사람을 이데아 아니면 무슨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가 블록체인을 설명해주던 구절 중 하나로 이 수필도 일기도 아닌 애매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이 구절이야말로 그를 조금이나마 대변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은,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그런데 이건 무신뢰, Trustless에요.
신뢰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뢰하지 못할 존재가 아니니까요.




+덧. 나는 최근에 ‘글쓰기를 중단한 이유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을 읽은 그는 내게 ‘그래도 민서 님은 쓰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로스해킹이든 마케팅이든 기획이든 개발이든 뭐든 간에 본질은 글이라고, 내가 고민하고 생각하는 그 자체로 나는 쓰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더라. 정말 눈물 많이 참은 날이었다.



+덧2. 작은 것이라도 행복함을 느끼게 해줄 줄 안다는 그의 말은 제주도에서 자란 레드향으로 돌아왔다. 내가 그의 텍스트에서 읽은 음성 -가벼우면서도 무게감 있는, 부드러우면서도 열정적인 그 파동- 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둘 다 건강 관리 잘합시다. 과거의 혹은 현재의 BTK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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