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다는 것도 참 복이구나, 휴가로 태국을 다녀온 후 생각했다. 그곳은 365일이 여름인 나라. 좀 덜 더운 여름, 그냥 여름, 엄청 여름. 숨 못 쉴 정도의 여름. 이 정도의 날씨가 반복된다니. 태어날 때부터 외국에 나가지 않는 한 평생 더운 날씨만 느끼고 살아갈 그 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내 입장에서 부럽지 않았다.
그리고
11월. 달력을 넘겼다. 추워졌다. 그리고 계절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혈액형으로 A, B, O, AB로 나뉘듯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계절'로 나뉜다는 느낌을 받는다. 꼭 본인이 태어난 계절이 아닌 그저 자신의 성향 내지는 성격에서 비롯돼 말이다.
겨울을 닮았던 그 사람. 그 사람과 겨울을 함께 보낸 것은 만나기 시작할 때, 그리고 헤어졌던 이듬해 겨울. 2번이었다. 그 사람은 참 겨울을 좋아했다. 막 추워지기 시작하는 이맘때의 날씨를 좋아했다. 추운 아침, 호- 불면 창문에 김이 서리는 그런 날씨를 좋아했다. 그래서 눈이 올 때마다 웃음 짓던 표정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떠났다. 다시 겨울이 다가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원래도 그렇게 겨울이 싫었는데 그 사람 덕분에 참 좋아졌던 계절이라 밉다. 이 계절이 다가오면 그 사람과 함께 보냈던 그 시간들이 생각나 싫다.
문득 주말에 카페에 홀로 앉아 기획안을 작성하고 있는데, 누군가 헤이즐넛 시럽을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 사람이 좋아하는 메뉴였음을 자연스레 상기시킨다. 한동안 그 커피를 무슨 맛으로 먹냐며 나무라던 내가 같은 메뉴를 시켜서 먹곤 했었지.
무심코 지나가는 길거리에 당신이 좋아하던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오면 또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무도 몰랐던 그 밴드를 내가 가장 먼저 좋아했는데, 이제는 너무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자주 흘러나오는 게 싫어서 안 들을 거라며 툴툴대던 모습.
어느 미팅 자리에 갔는데 보라색 셔츠를 입은 사람이 나왔을 때, 당신이 입었던 그 보라색 셔츠와 비슷해서 였을까. 당신은 흔치 않은 셔츠 색깔이라며 그렇게 잘 샀다고 자화자찬을 웃으며 늘어놓았던 그 모습마저 겹쳐진다.
이렇게 자주 문득문득 시도 때도 없이 마주치는 일상들을 없는 나는 당신과 비교한다. 그리워하는 것 같다. 당신은 어떠할지 궁금해하면서. 나만큼 나를 생각했으면. 밥을 먹으러 갈 때, 하늘 색깔이 너무 예쁠 때, 강아지와 산책을 할 때, 나만큼 적어도 그랬으면. 아주 사소한 순간에 문득 나를 기억해줬으면. 큰 욕심이겠지만.
찬 바람이 불고 온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