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등포시장역 유령 승강장

영등포시장역 지하에는 숨겨진 승강장이 있다.

by 아이린

기획자는 공간의 힘을 믿는다 – 그래서, 이 이야기를 첫 페이지에 꺼낸다

공간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획자는, 그 침묵 속에서 공간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의도 벚꽃축제를 기획할 때, 국회 뒤편으로 이어지는 그 벚꽃길은 단지 벚꽃이 많이 피는 명소가 아니었다.

나는 그곳을 도심 한가운데서 계절의 전환을 집단적으로 체험하는 장소로 보았다.
사람들은 매년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봄이 왔음을 확인했고, 그 장면은 일종의 도시적 의례였다.

‘경기상상캠퍼스’는 서울대 농대의 폐교였던 공간이다. 4만 평이 넘는 부지와 넓은 녹지를 품은 이곳은, 도시와 자연, 과거와 현재, 교육과 예술이 중첩되는 특별한 무대였다.
공간 그 자체가 메시지였고, 그 안에 어떤 프로그램을 넣든 결국은 공간이 먼저 관객에게 말을 걸었다.

‘북촌한옥마을’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삶이 깃든 골목의 결, 마당을 중심으로 설계된 한옥 구조, 지붕 사이로 흘러드는 빛과 바람까지도 기획 요소가 되었다.
나는 정체성과 색깔이 다른 공간에서 기획을 펼치며,

그 안에 새로운 콘텐츠를 덧입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깃든 서사를 끌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기획의 시작을 공간의 고유한 힘을 읽어내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공간이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네는지,

어떤 기억을 꺼내고 싶어 하는지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이 이야기를 ‘기획자의 장바구니’ 첫번째 이야기로 담기로 했다.




지하에 잠든 시간 - 5호선 영등포시장역의 유령 승강장

서울에 살면서도 모르는 서울이 있다.

매일 타고 다니는 지하철 속, 우리가 지나치는 것 같지만 한 번도 닿지 못한 공간. 바로 지하 깊숙이 숨어 있는 ‘유령 승강장’ 이야기다.

오늘 내가 꺼내려는 기억은, 서울 5호선 영등포시장역 지하 어딘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잠들어 있던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심지어, 교통공사 직원들도 이 곳에 근무하기 전까지는 존재를 모른다는 그 곳!)

2020년, 나는 서울시가 추진 중이던 ‘서울 문화예술철도’ 사업 관계자들과 함께 이 유령 승강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영등포시장역의 숨겨진 유령승강장으로 가는 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딜까?
편의점 옆 이 평범하게 생긴 노란문이 바로 그 유령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문이다.

허가받은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편의점 옆 노란 철문을 지나고, 울리는 발소리를 따라 계단을 몇 층이나 내려가자, 시간이 멈춘 듯한 장소가 나를 맞이했다.

콘크리트로 거칠게 마감된 벽면, 철골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 그리고 빛이라고는 푸르스름한 형광등 몇 개가 간신히 빛을 뿜어내고 있던 지하 4층의 거대하고 압도적인 날 것 그대로의 어두운 플랫폼.

누군가 이곳에 시간을 숨겨두었다고 해도 믿을 법했다. 말 그대로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없는 공간”이었다.

유령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왠지 으스스하다)
원래라면 지하철 전동차가 지나갔어야 하는 길. 푸르스름한 형광등 빛이 희미하다.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과 벽이 둘러싼, 왠지모를 위압감과 을씨년스러움.
유령 승강장이 얼마나 높은지를 체감할 수 있는 사진(사진 속 인물은 교통공사 관계자)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묘한 설렘이 다시 밀려온다.

철문을 열고 지하 깊숙이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가며 우리는 손에 빔 프로젝터를 하나 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콘크리트 위에 영상을 쏘아 올리며, “이 공간을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열띤 상상을 펼치던 관계자들이 기억난다.

그 텅 빈 승강장 안에서 울려 퍼지던 목소리, 어둠 속에서 화면 위로 번지던 빛의 잔상, 그리고 그 공간이 줄 수 있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한 설렘.

그것은 단순한 장소 방문이 아니라, ‘잠든 공간을 다시 깨우는 상상 실험’이었다.

텅 빈 콘크리트 승강장에 빔 프로젝트로 이미지를 투사한 모습
콘크리트 구조물의 공간감이 빔 프로젝트에서 쏘는 물거품 이미지와 중첩된 모습


이 유령 승강장은 왜 존재할까?

사실 이 공간은 애초부터 아무 용도도 없이 만들어진 공간은 아니었다.

1990년대 서울시 도시철도 2기 계획 당시, 5호선을 짓던 도시계획자들은 그 당시 계획중이던 10호선과 5호선의 환승을 위해 미리 승강장 구조를 지어두었다.

그러나 도시계획은 늘 그리 간단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10호선의 계획은 결국 백지화됐고, 공사비와 시간 들여 만든 지하 구조물은 ‘쓸모없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이 플랫폼은 잊힌 채로 남겨졌다.

아무도 밟지 않은 플랫폼의 바닥은 먼지와 텅 빈 울림으로 가득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태울 준비는 늘 되어 있는 플랫폼. 그 풍경은 왠지 짠했다.

도심 한복판에서 가장 조용한 장소를 찾는다면, 아마 여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곳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잊힌 공간은 때때로 가장 강렬한 기억이 되기도 한다. 2023년, 블리자드가 ‘디아블로4’ 런칭을 기념해 이 유령 승강장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했다.

이름하여 ‘디아블로 IV 헬스테이션’. 지하 던전 같은 공간에 붉은 조명을 설치하고, 괴물의 신음 소리와 불길한 효과음으로 채워 넣었다.

참가자는 지하 4층을 직접 내려가야 했고, 그 자체가 게임 속 스토리의 일부가 되는 몰입형 전시였다. “도시의 숨겨진 레벨을 열었다”는 평이 나올 만큼, 유령 승강장이 가진 분위기와 콘텐츠가 찰떡같이 어우러진 경험이었다.

그런 움직임은 하나의 신호였다. 2025년 서울교통공사는 드디어 이 공간을 시민에게 돌려주기 위한 공모를 시작했고, 나는 그 발표를 보자마자 진심으로 흥분했다. 내가 사진으로, 감각으로, 기억으로 담아두었던 그 장소가 드디어 도시의 의제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디아블로 특별체험존 '헬스테이션' 입구 (출처: 게임메카)
지하철이 지나가는 길목에 세워진 관들 (출처: 게임메카)
승강장 구조물 안에 조성된 릴리트의 석상과 마법진 (출처: 게임메카)


서울 서부권, 왜 이 지하 공간이 더 특별한가

서울에서 ‘문화생활’ 하면 떠오르는 지역은 강남, 홍대, 종로, 성수 정도이다.

하지만 영등포, 양천, 신도림처럼 서울 서부권 지역은 다르다.

아파트는 많지만 쾌적하고 괜찮은 전시공간 하나 찾기 힘들고, 창작 공간도 부족하다.

많은 인구에 비해 문화예술 인프라가 불균형한 지역 중 하나다.

그런데 영등포시장역은 그 서부권 중심에 있다.

여긴 아침에는 시장을 보러 나온 주부와 시니어 세대, 저녁에는 귀가하는 직장인과 학생이 빽빽하게 오가는 교차점이다.

이 말인즉슨, 유령 승강장이 ‘특별한 사람만을 위한’ 예술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세대와 생활 패턴을 가진 시민들이 잠시 들를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전통시장의 열기와 대형 아파트 단지의 일상 사이, 사람들로 바쁘게 오가는 역사의 아래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난다면, 그 자체로 서울 서부권 문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해외에서는 지하 공간에 이런 것을 시도했다

① 뉴욕 로우라인(The Lowline): 약 60년간 방치된 맨해튼의 폐쇄된 철도 터미널(트롤리 터미널)을 개조해 세계 최초의 지하 공원을 만들려고 했던 프로젝트.

버려진 철도를 개조한 고가공원인 '하이라인'에 영감을 받아 '로우라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상에서 태양광을 수집하여 지하로 전달하는 '리모트 스카이라이트' 기술을 활용해 지하에 식물을 키우는 신기술을 선보였다. 이런 혁신적인 접근은 도시 내 유휴 공간을 활용한 지속 가능한 공공 공간 모델로 주목받으며 2016년 뉴욕시로부터 조건부 승인을 받았으나, 자금조달의 어려움으로 2020년 2월 공식적으로 프로젝트는 휴면 상태로 들어갔다.

맨해튼 트롤리 터미널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리모트 스카이라이트 기술이 적용된 로우라인 랩 지하정원 (출처: 위키피디아)

② 파리 Les UX: 1980년대 초 프랑스 파리 라탱 지구에서 시작된, 파리의 지하 공간을 비공식적으로 활용하여 문화예술 활동을 펼치는 비밀 지하 조직.

복원팀, 기획팀, 침투팀 등 다양한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파리의 지하 터널, 폐쇄된 건물, 지하철역 등에서 비밀리에 게릴라성 문화적 활동을 하고 있다.

판테온 지하에 숨어들어 시계를 몰래 복원하거나, 궁전 아래 비밀 영화관을 설치해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등의 사건으로 대외적으로 알려졌다. 최근 활동이나 프로젝트가 공개된 것은 없지만 프랑스 당국과의 아슬아슬한 추격전을 벌이며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한다.

UX가 Palais de Chaillot 지하에 만든 영화관 (출처: UX, Wired)
2010년 강도당한 미술작품의 복제품을 전시하는 지하 미술 전시회 (출처: UX, Wired)


유령 승강장을 이렇게 써보면 어떨까?

1. 청년 예술가 지하 레지던시 “Underground Studio Y”

젊은 예술가들이 지하에서 머물며 작업하는 공간. 전통시장이라는 특수한 장소성과 만나, 소리, 빛, 냄새 같은 도시의 감각을 예술로 풀어낼 수 있다. 기간제 입주 작가들과 그 결과를 전시하는 쇼케이스, 관객과 함께 하는 오픈 스튜디오 프로그램도 가능하다.

2. 지하 정원 프로젝트 “Metro Garden Y”

지하철 속에 녹색 식물이 자라는 공간, 상상해본 적 있는가?

뉴욕 로우라인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 태양광 반사판과 식물 전용 조명을 이용해 도심 속 정원을 만들자.

바쁘게 살아가는 직장인과 학생에겐 퇴근길의 쉼표가, 시장을 오가는 시니어에겐 잠시 앉아 숨 고를 수 있는 치유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식물과 예술이 결합한 전시도 함께 열 수 있다.

3. 지하철과 기억의 교차점 “인터랙티브 기록 전시관”

서울 지하철 5호선은 2025년 올해 개통 30주년을 맞이했다. 우리가 지나온 도시의 변화, 노선의 흔적, 시민의 추억을 인터랙티브하게 구성한 아카이브 전시 공간을 상상해보자. 스마트폰으로 QR을 찍으면, 그 장소의 과거 모습이 AR로 떠오른다든가. 일상의 공간에 시간을 더하는 프로젝트다.

이름하야 '기억으로 가는 환승역'


지금은 유령이지만, 곧 기억이 될 공간

서울교통공사의 공모는 마감되었고, 당선작도 4월 선정됐다.

아직 당선작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 공간이 이제 더 이상 닫힌 공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열릴 공간이 될 거라 기대한다.

트렌드와 구경꾼만 넘치는 힙플이 아니라, 일상과 섞이는, 그런 공간이면 좋겠다.

그곳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감각을 깨우고, 그들이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공간.


지나가다 “이런 데가 있었어?”라고 말하게 되는, 그 순간.

그때야말로 유령은 ‘기억’이 되고, 서울은 조금 더 흥미로운 도시가 된다.








참고자료:

- 로우라인 홈페이지 ☞ http://thelowline.org/

- 로우라인 지하 공원 제안서 보기 ☞ https://www.thelodownny.com/leslog/2016/09/exclusive-heres-your-first-look-at-the-lowline-underground-park-proposal.html

- Les UX 설명 보기 ☞ https://en.wikipedia.org/wiki/Les_UX

- Les UX의 활동 보기 ☞ https://web.archive.org/web/20120124225603/http://www.wired.com/magazine/2012/01/ff_ux/all/1

- 영등포시장역 지하 유휴공간 운영 아이디어 민간제안 공모 ☞ 공지사항 > 상세화면 : 알림마당>공지사항>공지사항

- 디아블로 4 지하 던전 자세히 보기 ☞ [포토] 영등포시장역 숨겨진 구역에 디아블로 4 던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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