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두근 Sep 26. 2020

3년 치 연봉을 드린다면, 명예퇴직하시겠습니까

사표를 내고 싶습니다

“선배! 술 한잔 합시다.”

“뭔 일 있니? 제수씨랑 싸웠어?”

“아뇨. 회사를 그만둬야 할지 고민입니다.”     


한동안 연락이 뜸하던 후배 K에게서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 3년 치 연봉을 주는 조건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고 했다. 사십 대 후반인 그는 아직 10년은 더 직장을 다닐 수 있다. 얼마 전 최선을 다했고 성과도 좋았는데 임원 승진에 실패한 이후 번아웃이 왔다고 했다. 그때부터 일에 의욕도 없고 자존감도 떨어진다고 했다. 월세 받는 오피스텔도 하나 있고, 3년 치 연봉이면 6년 치 생활비는 된다고 했다. 퇴직연금, 국민연금이 있고 나중에 정 안되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주택연금으로 활용할 생각이라고 했다.     


“퇴직하면 뭐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

“돈 버는 일은 안 해도 시간을 보낼 뭔가는 있어야 되는 거 아냐?”  

“그냥 등산, 사이클링, 여행 그리고 한 달에 한번 골프 라운딩... 하고 싶은 거 실컷 해야죠.”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일만 하다 죽기는 싫어요.”

“진짜 신청할 거야?”

“신청하고 싶어요. 그런데 마음이 오락가락해요.”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조건 좋을 때 그만두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도 수입은 끊기는데 아파트 관리비, 통신비, 지역 건강보험 등 아무것도 안 해도 매달 고정으로 들어가는 돈을 생각하면  마음이 흔들린다고 했다.

“제수씨랑 의논했니?”

“아직요. 마음을 정해서 말하려고요.”

“아냐. 내일 당장 제수씨랑 얘기해 봐. 그게 순서야!”    


나는 한동안 그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난 뒤, 거나하게 취한 그를 택시에 태워 보내주었다. 그와 헤어져서 돌아오면서 그가 아내의 동의를 얻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후배 스스로도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아내와 퇴직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며칠 뒤 결과가 궁금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희망퇴직 신청했니?” 

“아뇨. 아내가 퇴직 신청하면 이혼하겠대요.”

풀 죽은 그에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얼마 전 내가 퇴직 얘기 꺼냈다가 아내한테 혼쭐났던 기억이 났다.    


그가 아내랑 얘기하니 펄쩍 뛰면서 울었다고 한다. 아직 고등학생인 자녀들이 대학 졸업하고 취업하고 나서 생각해보자고 했다. 지금 퇴직한다면 이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후배는 아내의 눈물을 보고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후배는 회사에 대한 애정도 잃었고, 의욕도 없고, 경쟁하며 버틸 힘도 없다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나 어떡해요?”

“글쎄. 나도 비슷한 형편인데 뭐.”

       

나는 차라리 K가 부럽다. 희망퇴직하면 3년 치 연봉을 받을 수 있다니. 나는 퇴직한다고 해도 회사에서 한 푼도 더 받을 수 없다. 나도 가끔 퇴직을 꿈꾼다. 오랫동안 회사 인간으로 바쁘게 살다 보니, 이제는 자유가 간절히 그립다. 자유가 그립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불안한 미래 때문이다.    


나도 역시 아이들이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요즘 취업이 무척 어렵다는데 취업은 할 수 있을지 취업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도 없다. 명함이 없어지는 것도 두려운 일중의 하나이다. 명함 한 장으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설명이 필요 없다. 퇴직 후에 명함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우리보다 고령화 사회를 먼저 경험한 선진국에서는 재무적인 준비보다 퇴직 후에 할 일을 준비하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들은 연금제도가 잘 준비되어 재무적인 걱정은 적게 한다고 한다. 대신 은퇴 후에도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자신이 여전히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명함이 사라져도 자신만의 일, 취미, 봉사 등을 하면서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명함이 사라져도 내가 할 일이 준비되고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면, 나는 그때 사표를 던질 것이다. 그날을 기다린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