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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Mar 17. 2024

실비아 플라스에게

『벨 자』 속 에스더 그린우드에게


평생 처음으로 유엔 건물의 방음이 되는 심장부에서, 테니스를 치는 동시통역사 콘스탄틴과 관용어구를 많이 아는 러시아 여자 사이에 앉아 있으니 내가 끔찍하게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늘 부족했는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내 특기는 장학금 따기와 상 타기였는데 이제 그것도 끝나가고 있었다.

경마장이 아니라 거리에 던져진 경주마가 된 기분이었다. 대학 우승자인 풋볼 선수가 양복 차림으로 월스트리트와 마주 선 느낌과 비슷했다. 트로피에 새겨진 날짜는 묘비의 날짜와 다름없었다.

내 인생이 소설에 나오는 초록빛 무화과나무처럼 가지를 뻗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가지 끝마다 매달린 탐스러운 무화과 같은 멋진 미래가 손짓하고 윙크를 보냈다. 어떤 무화과는 남편과 행복한 가정과 아이들이었고, 어떤 것은 유명한 시인이었고, 또 어떤 것은 뛰어난 교수였다. 훌륭한 편집자라는 무화과도 있었고, 유럽과 아프리카와 남미인 무화과도 있었다. 어떤 것은 콘스탄틴, 소크라테스, 아틸라 등 이상한 이름과 엉뚱한 직업을 가진 연인이었다. 올림픽 여자 조정 챔피언인 무화과도 있었고, 이런 것들 위에는 내가 이해 못 하는 무화과가 더 많이 있었다.

무화과나무의 갈라진 자리에 앉아, 어느 열매를 딸지 정하지 못해서 배를 곪는 내가 보였다. 열매를 몽땅 따고 싶었다. 하나만 고르는 것은 나머지 모두를 잃는다는 뜻이었다. 결정을 못하고 그렇게 앉아 있는 사이, 무화과는 쪼글쪼글 검게 변하더니 하나씩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p. 106-107 실비아 플라스, 『벨 자』



익은 것을 거두지 않으면 썩는다. 익는다는 건 과정이자 결과다. 삶이란 나무의 가지에 걸린 몇 개의 열매를 본다. 가지가 갈라진 사이에 앉아 무엇을 딸까 망설이는 동안 열매 하나가 땅에 뚝 떨어졌다. 썩어 거름이 되어 다시 내 삶의 자양분이 되기를 바랐다.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일단 따고 보자는 생각이다. 삶이라는 나무도 다른 나무처럼 꽃이 피고 지고 열매가 자라나고 익고 떨어지고 이파리마저 모조리 떨어지는 과정을 반복하기를 바란다. 내게서 피어난 다른 열매도 따볼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 일단 손을 뻗는 중이다. 하나를 따보면, 다른 하나를 따는 일은 조금 더 쉬울 테니까.


그러니까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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