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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Feb 25. 2024

사는 게 지겹다

두들겨 맞을 소리 하기

한 주를 조졌다.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밤에 너무 늦게 자서, 유튜브를 보느라 거의 아침에 자서 그런가 했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없는 사람도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야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수면을 유예한 채 유튜브 속으로, 아무런 의지도 힘도 쓸 필요 없고 그래서 의미도 없지만 재미는 있는 행위를 통해 이성을 마비시키니 시간도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지된 건 나뿐이고 시간은 계속 흐른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독서실에 갔고 집중력이 오래가지 않았다. 엊그제는 그마저도 포기하고 바다나 보러 갔다. 모든 게 지겨웠다. 존재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무엇을 해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 난 죽고 싶지도 않고 죽는 건 무섭다. 하고 싶은 게 많고, 그걸 하기 위해서는 직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독서실에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러 다니고 있다. 한 번 몰입상태가 되면 그것도 제법 재밌다. 법에는 차가운 논리와 일관성이 있고 판례에는 인간미가 묻어날 때가 있다. 행정학의 이론들이 서로를 비판하고 반박하며 인간세상을 어떻게든 더 효율적이고도 아름답게 운영해 보려는 시도는 재미있다. 연도와 유물과 유적이름은 공허하게 느껴지지만 한 줄에 꿰어보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국어와 영어는 뭐, 내가 늘 좋아하는 거니까.


하지만 갑자기 이 모든 게 지겹게 느껴졌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서는 매일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 다들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하루의 3분의 1 이상을 똑같은 일을 하며 보내고 저녁에 퇴근한다. 매일 똑같은 일상. 저편의 지구는 여전히 전쟁 중이며 당장 생존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런 반복되는 삶을 살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을 때가 있다. 그러니 다들 미친 듯이 사람을 만나려고 모임에 소개팅을 나가고, 온갖 것에 돈을 쓰는 거겠지.



정신상태가 이럴 때는 그냥 해야 하는 일을 하기 싫어서라고들 한다. 그것도 맞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공부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공부가 좋은 건 아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게 가장 편하고 익숙할 뿐이지. 또다시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고 마음을 다잡으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들기도 싫고 존재하기도 싫었다. 일주일 새 '지겹다'는 말을 정말 많이 했다. 사는 게 지겹다. 분명 지난 글을 쓸 때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는데.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고 보고 듣고 읽고 먹고 가보고 싶은 곳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실에 처박혀서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힘들겠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고 가보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번주는 대체 왜?


이따위 정신상태를 두들겨 줄 자극, 동기부여 영상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윽박질러 돌이키며 굳게 만든 마음은 고함이 없으면 다시 흐물흐물하게 풀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내게 소리 지르고 가슴을 쑤셔댈 말을 일부러 찾아 듣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해서 공부하는 나는 파블로프의 개 같으니까. 나는 스키너가 싫다. 하지만 이것 역시 회피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한 시간 반이 걸려 바다를 보러 갔다. 사람보다는 자연이 더 위로가 된다. 문득 실비아 플라스의 소설이 생각나서, 지하철을 타는 내내 읽었다. 예전에는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감정과 의식이 이제는 내 것처럼 느껴졌다. 『벨 자』. 주인공을 가둔 유리병은 내게도 있는 것 같다. 그건 나 자신이 만든 것이기도, 이 세상이 만든 것이기도 하다.



바닷가에 서서 끊임없이 밀려들고 나가는 파도를 봤다. 그걸 보며 역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음을 느꼈다. 파도는 매일 똑같이 움직이는데 안 지루할까, 그런 생각도 했다. 의식이 없으니 지루함도 모르겠지. 한 번도 바다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알았다. 나 갑자기 모든 의미와 의욕을 잃었구나. 사는 게 이렇게 지루한 적이 없었다. 어떤 백수들은 이 지루하고 쓸모없는 감각이 싫어서 게임, 유튜브, 아무튼 힘들이지 않고 자기 존재 자체를 잊을 수 있는 행위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하기 싫었다.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가 지겹다.

 

 나는 도린에게 모피 쇼에도, 점심 모임이나 영화 시사회에도 안 갈 거라고 말했다. 코니아일랜드에도 가고 싶지 않다고, 그냥 누워 있고 싶다고 했다. 도린이 나가자 어째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지내지 못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어서, 어째서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면서 지내지 못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도린처럼 살면 좋을 텐데. 그 생각을 하자 더 슬프고 고단해졌다.
p. 46『벨 자』, 실비아 플라스


어째서 해야 하는 공부를 하면서 지내지 못할까. 차라리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술을 진탕 마시거나 하는, 내가 보기에 '하면 안 되는 일'을 해보는 건 어떨까. 근데 그런 것도 하지 못하는 게 주인공 에스더나 나나 똑같다.


 평생 처음으로 유엔 건물의 방음이 되는 심장부에서, 테니스를 치는 동시통역사 콘스탄틴과 관용어구를 많이 아는 러시아 여자 사이에 앉아 있으니 내가 끔찍하게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늘 부족했는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내 특기는 장학금 따기와 상 타기였는데 이제 그것도 끝나가고 있었다.
 경마장이 아니라 거리에 던져진 경주마가 된 기분이었다. 대학 우승자인 풋볼 선수가 양복 차림으로 월스트리트와 마주 선 느낌과 비슷했다. 트로피에 새겨진 날짜는 묘비의 날짜와 다름없었다.
 내 인생이 소설에 나오는 초록빛 무화과나무처럼 가지를 뻗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가지 끝마다 매달린 탐스러운 무화과 같은 멋진 미래가 손짓하고 윙크를 보냈다. 어떤 무화과는 남편과 행복한 가정과 아이들이었고, 어떤 것은 유명한 시인이었고, 또 어떤 것은 뛰어난 교수였다. 훌륭한 편집자라는 무화과도 있었고, 유럽과 아프리카와 남미인 무화과도 있었다. 어떤 것은 콘스탄틴, 소크라테스, 아틸라 등 이상한 이름과 엉뚱한 직업을 가진 연인이었다. 올림픽 여자 조정 챔피언인 무화과도 있었고, 이런 것들 위에는 내가 이해 못 하는 무화과가 더 많이 있었다.
 무화과나무의 갈라진 자리에 앉아, 어느 열매를 딸지 정하지 못해서 배를 곪는 내가 보였다. 열매를 몽땅 따고 싶었다. 하나만 고르는 것은 나머지 모두를 잃는다는 뜻이었다. 결정을 못하고 그렇게 앉아 있는 사이, 무화과는 쪼글쪼글 검게 변하더니 하나씩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p. 106-107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수많은 가능성을 본다. 나도 그 가능성을 모조리 쟁취하고 싶은 걸까. 그래서 지금 해야 하는 일에, 나를 억지로 붙들어 매어 줄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걸까. 내 무화과는 몇 개나 썩어 땅에 떨었을까. 내 특기가 대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살그머니 침대로 들어가서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래도 빛이 들자 머리를 베개 밑에 파묻고 밤인 척했다.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기대할 게 없었다.
p. 158

 

이번주는 눈을 뜰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무기력증이 엿가락처럼 일레인의 팔다리에 퍼졌다. 말라리아에 걸리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속도라면 하루에 한 페이지를 쓰면 다행이다 싶었다. 그제야 문제가 뭔지 알았다.
 난 경험이 필요했다.
 남자랑 자본 적도 없고, 아기를 낳아본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이 죽는 걸 본 적도 없이 어떻게 인생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여자애는 아프리카의 피그미들 틈에서 겪은 모험을 단편으로 써서 상을 받았다. 그런 경우와 감히 어떻게 경쟁한단 말인가?
p. 163-164

 

나도 경험이 필요하다. 난 어딘가 직장에 제대로 소속되어 본 적도, 연애를 길게 해 본 적도, 누군가 죽는 걸 본 적도 없다. 지금껏 아무것도 안 하며 산 건 아니지만 내가 한 경험은 너무나 좁고 얕게 느껴진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재능이 있었는데 이번주는 그마저도 잃은 것 같다.



반절 넘게 읽은 소설 속 주인공 에스더는 결국 정신과에 갔다. 에스더는 이런 병적인 무기력함을 어떻게 타개할지가 궁금하면서도 두렵다. 예전에 읽은 기억으로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치료의 일환으로 전기충격을 받기도 하던데 나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다. 책을 끝까지 다 읽으면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에 관해 생각하면 희망은 없어 보인다. 그녀는 서른 살의 나이로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은 채로 자살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였을까.

 

물론 나는 에스더처럼, 실비아 플라스처럼 할 생각이 없다. 그 정도의 능력도 없고. 내가 쓴 글 중에 가장 우울하고 비관적인 글이다. 하지만 쓰고 나니까 후련하다. '지금 이런 상태면 실비아 플라스 소설이 이해가 되겠다'는 생각에 그걸 읽은 나도 웃기고 좋다. 역시 동영상보다는 책이 좋다. 독서실에 처박혀서 죽어라 공부나 해야 하는 처지이니 독서도 분명 도피이고 회피겠지만, 유튜브는 인식을 마비시킨다면 책은 나를 아주 정확하게 인식하게 해 준다. 지금 내 상태를 정의할 수 있게 해 준다.

 

내가 에스더처럼 수많은 하고 싶은 것들을 앞에 두고 무기력하게 괴로워하고 있는 거라면, 역시나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이제부터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내일의 나는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기를 바란다. 몰입에 들어가기 위한 저항감을 이겨내고 결국 다시 공부에 몰입해서, 타이머로 시간을 측정해 가두지 않아도 시간을 지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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