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의 세계에 대하여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진다. 그 순간 ‘알고 싶다’라는 말은 ‘당신을 좋아하고 싶어요’와 ‘당신을 좋아해요’라는 말의 중간 단계쯤 된다. 나는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그 사람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 중 하나는 그가 읽은 책과 그가 쓴 글이다. 특히 나는 직접 쓴 글 읽기를 좋아했다. SNS 같은 곳에 사진과 함께 올린 짧은 글도 좋고, 진지하게 시간을 들여 길게 쓴 글도 좋다. 일기만큼 진솔하지는 못하겠지만 글은 그 사람의 생각을, 그러니까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그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그를 괴롭히는 고민까지 세밀하게 보여주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요즘 들어 무척 궁금해진, 한편으로는 내게 많은 생각과 다짐을 하게 해 준 그 사람에 대한 글이다. 내가 듣고 읽고 본 그 사람의 세계에 관한 소고이자, 해석이다.
그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가사를 쓰고, 거기에 곡을 붙이고, 노래를 부른다. 늘 자신을 ‘싱어송라이터’라고 소개한다. 노래는 그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며 무척 좋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음악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는 사람을 우리는 음악가이자 ‘예술가’라고 부른다.
나는 이것을 그가 싱어게인 1라운드 통과 후 쓴 글에서 선명하게 느꼈다. ‘무대 앞에서 감정을 쏟고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참 무방비한 상태일 때가 많은데’라는 말. 가수에게 노래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가진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수단, 그리고 자신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그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순간은 그 모든 것을 가감 없이 내보이는 순간이며,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떻게 ‘무방비한 상태’가 아닐 수 있을까.
그런데 그 무방비함에 누군가가 손뼉을 쳐준다는 건, 누군가가 ‘나 자신의 본질’ 혹은 ‘내 전부’에 대해 박수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물론 나 자체를 긍정해 주거나, 나라는 존재 그 자체에 찬탄을 보내는 느낌도 들지 않을까. 지금 이대로의 ‘나’로서도 괜찮다는 느낌.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박수받지 못할 때는 나 자신을 부정당하는 셈이기도 하다. 그리고 박수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그 무방비함에 손뼉을 쳐주는 게 하면서도 두려움이 동시에 오는 걸 경험한다’라고 하는 게 아닐까.
좋았다. 1라운드에서 자신이 ‘숲인지 바다인지’도 알지 못했다던, 그 정체성의 혼돈 속에 놓인 자신을 토로하고서 박수를 받았을 때 놀라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던 그가. 자기 자신을 작품으로 내세우는, 오로지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말 같았다. 예술가에게는 작품이 아니라 그의 존재 양식 자체가 예술이 되는 거니까.
‘나’라는 단어를 가진 수많은 언어가 있다. ‘당장 생각나는거 이 정도’라는 말은 자신이 아는 외국어가 이게 다라는 뜻이 아니라, ‘이게 진정한 내 모습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의미 같다. 그가 가진 ‘나’에 대한 고민은 매 라운드마다 이어진다.
그가 스스로 정의하는 ‘나’는 별로 다양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위의 글에서도 ‘더 많을거라 믿고 싶다’라고 했을까.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이미 다 쓴 것 같은데, 나는 이미 소진되어 버린 것 같은데 뭔가를 더 해내야만 하는 순간이란 늘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이를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경험하게 하는 시간이다.
새로운 나를 발견해내지 못하면 더는 보여줄 게 없는 느낌. 더 많은 내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이는 비단 그만의 고민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밝지만 어둡고 절망적이지만 희망적인 색채를 다 가지고 있는 신기한 사람. 인간은 언제나 모순을 품고 그것과 싸우기도 하는 존재지만, 이를 자각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결국은 그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나는 참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에게서 나는 일관성과 모순을 동시에 보았다. 그는 매 라운드, 여러 가사와 멜로디를 통해서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만을 했다.
후일 인터뷰에서 ‘내가 절대 부를 수 없는 노래들이 있다’라고 말하는 그의 진정성에 감탄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자신이 가진 경험의 깊이와 폭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서사가 있다고 말한다. 이거야말로 자기 스스로를 정말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인데, 그럼에도 그는 긴 시간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왔다.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살면서 자신이 모든 마음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그 속에서 계속 살고 싶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서 부러웠다. 심플하면서도 확실했고 동시에 모호하다니, 역시 모순이란 아름다운 게 틀림없다.
모순 속에서도 나만의 ‘답’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답을 만들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나를 발견했으니, 그의 ‘나’가 하나 더 늘었기를 바란다. 그가 자신을 발견해 나가면서 결국은 그것이 원래의 자신에게 있는 모습임을 깨닫는 그 과정, ‘그다움’을 지키면서도 결국은 자신을 넓혀간 그 과정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경연에서 부른 모든 노래가 ‘노래’ 그 자체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했다. 나는 그처럼 무언가를 그 자체로 사랑한 적이 있었는가. 예전에는 글쓰기가 그랬었는데,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직접 만들었다는 블로그에는 그가 6년 전부터 쓴 글들이 있다. 누군가의 삶을, 무척이나 알고 싶은 누군가를 그가 쓴 글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참 즐겁다. 물론 이는 일방적인 관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연히 듣게 된 그의 노래에서, 그의 흔들림과 고뇌와 기쁨과 슬픔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고민과 겹치는 부분을, 그러한 고민에 대한 위로와 해답을 얻었으니 그도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늦은 밤 독서실에서 집으로 가는 길, 지금은 아무것도 몰라도 울지 말라는 가사를 곱씹으면서 입술에 힘을 주고 걸었다. 이 지난한 수험기간이 좋은 결말로 끝나기 전에는 늘 그렇게 울지 않기 위해 애써야겠지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시간을 먼저 걸으며 여전히 잘 알 수는 없지만 계속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이의 노래는 오래도록 위로가 되어줄 것 같다. 자극적이지 않고 말을 건네는 듯한 노랫말이 내내 맴돌았다.
불안에 짓눌려 잠에서 깨고 싶지 않은 아침, 반쯤 연 커튼 사이 푸른빛에 의지해 일기를 썼었다. 잊혀져가는 어제, 도대체 뭘 한 건지 알 수 없는, 헛되이 보낸 듯한 그런 어제는 사실 반짝이는 별 같다고 해주는 노래를 들었다. 밤이 깊어질 때, 그러니까 내가 고민과 불안을 헤매며 뒤돌아볼 때 그러한 어제들은 반짝이는 별 같아 보일 것이다. 밤이 깊어질 때 더욱 빛날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돌이켜 봤을 때 나를 위한 의미가 되어줄 오늘을 살자. 그렇게 다짐하며 아주 길었던 도피성 수면을 조금씩 이겨내고 있다. 돌이켜봤을 때 의미를 띠고서 별처럼 빛날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 그의 노래가 내게 준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진다. 그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무엇이 대체 나를 끌어당긴 그러한 외면을 피워냈는지 파헤쳐보고 싶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내가 톺아본 홍이삭의 세계에 대해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다.
내면이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홀로 내면으로 침잠하는 시간이 여느 때보다도 편하고 익숙하지만, 그래서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 자신의 결을 섬세히 들여다보았기에 본인이 가진 모순과 혼란을 괴로울 만큼 기민하게 직시하는 이들. 그들은 분명 타인과 연결되고 싶지만 자기 안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에, 자신을 해석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쓴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데 힘을 쓰니 외부에 쓸 에너지가 그렇게 많지 않다. 나 자신과 너무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에 타인과 깊은 교감을 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그 자신의 안으로 아주 깊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복잡한 내면의 결을 아주 섬세한 방식으로 내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는다. 우리는 결국 모두 같은 인간이니까. 외롭고도 복잡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 조심스럽고 예리하게 자신의 한 결을 보여줄 때, 한 줄의 가사로, 선율로, 박자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의 내면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조각을 발견하기도 하기 때문에.
홍이삭의 세계는 그렇다. 언제고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노래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노래들은 조심스럽게 세상 밖으로 나가 결국 다른 사람의 내면까지 파고든다. 나는 그에게서 나를 본다. 그의 노래에서 나의 기쁨과 슬픔, 고민과 불안, 사랑과 이별을 발견한다.
그의 세계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