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백수가 아니라 기간제 백수인데도 무기력한 이유
공무원 필기시험에 붙었다. 아직 면접이 남아있지만, 점수가 안정권이라 이변이 없는 한 최종합격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모님은 이 기간이 이제 다시는 없을 좋은 시간이니 푹 쉬라고 하셨다. 취직되면 평생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고. 필기합격 발표가 난 지도 오래되었고 그 여운이 가실 만도 하건만, 아빠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고 한다. 딸내미가 내일모레 서른인데도.
이전에 쓴 글(삶의 단계에 대해 생각한다)에서 말했듯이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 해도 그 무엇도 ‘해결’되지 않음을 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목표로 하던 시험에 붙었지만 아직 면접이라는 단계가 남아있고, 그걸 위한 면접스터디 일정도 빡빡하게 잡아뒀다. ‘삶의 단계’라고 거창하게 명명할 정도는 아니라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쌓여있다. 그렇다면 내가 무기력한 이유는 오로지 죽어야만 이 모든 퀘스트가 끝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인가? 와,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불과 넉 달 전에 ‘대입, 취직, 연애, 결혼, 출산 같은 건 대다수가 따르는 것이면서도 사회가 정해놓은 인위적인 구분일 뿐이니 그것들만 통과하면 다 해결될 거로 생각하지 말 것’이라고 써놓고서, 요즘은 완전히 정반대인 생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공무원 시험 합격이라는 목표를 일정 부분 달성했으니 그간의 노력에 박수를 짝짝! 쳐주고 앞으로의 순간순간도 알차게 채워나갈 생각은 버려두고서 말이다.
솔직히 필기시험 공부보다는 면접시험 준비가 더 재밌을 텐데, 실컷 늦잠 자고 쉬면서 나에 대한 이야깃거리만 잔뜩 준비하면 되는 이 복에 겨운 기간이 도리어 괴로웠다. 분명 나는 드디어 ‘나의 직업’이라고 당당히 소개할 타이틀을 얻은 것인데도. 물론 이제는 그 짜증 나고 무기력하고 괴로운 기분이 무엇 때문인지 안다. 관문 하나를 통과한다고 해서 삶이 관성대로 흐르지 않듯이, 직업이라는 것 역시 절대로 나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곱씹으며, 또렷하게 정신을 차리고 나 자신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내가 이런 직업을 가졌다’란 사실은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제 직업이 생겼으니 사색이고 노력이고 다 집어치우고 안주해도 된다는 생각은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지난 몇 주를 정확히 이와 반대인 생각 속에 살았다.
사실은 오늘 면접스터디를 위해 예비 동기들을 만나보고서야 이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직장’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기 전, 그곳에서 함께 일할 사람들을 미리 만나보며 새로이 맺게 될 인간관계가 어떨지 어렴풋이 그려보았다. 이제는 누군가의 울타리 없이 내가 나를 먹여 살리고, 원치 않은 인간관계도 맺어야 하며,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나의 마음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유형의 일과 사람도 해내고 견디고 상대해야 할 뿐이지 나는 여전히 불안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그 대답에 따른 삶을 이루기 위해 순간순간을 귀하게 채워 나가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는 분열될 거다.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지만 일이 내게 가지는 의미를 조금도 찾으려 하지 않거나 찾지 못하며, 그저 다달이 들어오는 돈으로 온갖 쾌락을 추구하는 소비 기계가 될 거다. 지금 이런 정신 상태로 계속 산다면 분명히 그럴 거다. 그리고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는 말은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말과는 다르다. 나는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종종 그런 시간을 가져야만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 오늘, 여유가 생겼음에도 도저히 나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었던 시간을 끝내고 엉망진창으로나마 내 감정을 써내려 본다. 내일부터는 달리 숨쉬기를 기대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