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와 홈리스 싱글맘

by 해니

추운 겨울의 한 날이다. 맨해튼의 겨울은 매서운 바람으로 얼은 몸을 더 움츠리게 만든다.

남편과 함께 주일 예배를 마치고 칼바람을 피해 서둘러 역으로 향하던 길, 추운 아스팔트 바닥에 의자도 없이 앉아있는 어린아이와 엄마를 마주했다.

날이 너무 추워 가던 대로 발걸음을 재촉하려다, 날이 너무 추워 이내 걸음을 멈춰 섰다.

그냥 지나치기엔 아스팔트 바닥이 너무 차가워보인 탓이다.

바로 옆으로 피자와 칼조네 등을 파는 이탈리안 델리가 있어 곧장 가게에 들어가 피자 몇 조각과 음료를 샀다.


쭈뼛거리며 둘에게 다가가 피자 박스를 내밀며 묻는다.

- 피자 좀 샀는데 먹어볼래요?

여자는 경계가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에게 박스를 건넨다. 귀여운 꼬마 여자아이는 피자에 올라간 데리야끼 치킨 조각을 골라먹는다. 좋아하는 재료 골라먹는 건 미국 애들도 똑같다. 아이가 피자를 곧잘 먹자 엄마도 먹기 시작한다. 랜치 소스가 올라간 피자를 샀는데 다행히 그녀의 입맛에 맞았다.

- 랜치 소스를 좋아해요. 랜치가 올라간 피자는 처음인데 맛있네요!

역시 음식은 사람을 빠르게 가까워지게 한다. 추운 날씨에 피자는 식어버렸지만 피자 덕에 대화는 좀 따뜻해졌다.


아이 엄마는 쉘터에서 아이와 함께 산다고 했다. 다행히 잠잘 곳이 있고 아이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

하지만 돈 버는 것이 문제다. 그녀는 자신이 HIV가 있어 일을 하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아이와 먹고살기 위해선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데 마땅히 방법이 없어 결국 길거리 생활을 시작했다.

평일엔 혼자, 주말엔 아이를 쉘터에 혼자 둘 수 없어 함께 나온다.


그녀는 가만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그 울음이 너무 조용해 그녀의 표정엔 큰 요동이 없었다. 마치 이런 울음은 무표정처럼 익숙한 것이라는 듯. 오늘 몇 시간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들에게 말 걸어온 사람이 우리뿐이었단다.

- 이렇게 어린 아이랑 있는데 어떻게 다들 못 본 척 지나갈 수가 있어요?

못 본 척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 간다. 나도 처음엔 추운데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으니. 눈을 마주치면 마음이 불편할 게 뻔하고 당장 도움을 줄 수 없으니 차라리 못 본 척하는 거다. 그렇지만 개인의 사정들은 그녀에게 매정하게만 들릴 뿐이다. 그녀에게 희망은 낯선 사람들의 도움뿐이었으니까.

- 어떤 사람들은 욕을 하고 지나가기도 해요. 애를 이용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사정을 모른다. 주말에 아이를 혼자 두고 나올 수 없어 차가운 길거리로 작은 딸을 데리고 나온 마음도, HIV라는 질병의 장벽에 속수무책 길거리 구걸을 시작하게 된 현실도.


그러나 그녀는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스러운 아이로 딸을 키워냈다. 아이의 낯빛에는 상처가 없었다. 사랑받고 자랐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는 얼굴이었다.

- 아이가 참 밝아요. 엄마 말도 잘 듣고.

- 내 딸은 잘못이 없으니까요. 나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요. 아이가 생기고 나선 술도 안 마셔요. 길거리에 있다 보면 약을 권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난 절대 안 합니다. 난 이 아이 때문에 살아요.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다. 사랑할 존재가 있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으니까. 아이는 손 소독제를 사용하지 않고는 피자를 먹지도, 물구나무서기를 하지도 않았다.

- 물구나무서기 하고 손소독제 쓰겠다고 약속해.

엄마가 단호한 얼굴로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아이는 우리에게 멋진 물구나무 기술을 자랑할 수 있었다. 별 것 아닌 듯 보이지만 길거리에서 아이와 구걸을 하는 홈리스 부모에게 작은 위생을 챙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이 엄마는 이런 환경에서도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진짜 '엄마'였다. 무책임한 부모들의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 세상에서, 아이를 이렇게나 잘 키워낸 홈리스 엄마라니. 더 건강한 음식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눈물 흘리는 그녀를 보며 존경심마저 들었다.


우연히 교회에서 쓰고 남은 레인보우 스크래치북 한 권이 내게 있었다. 검은 종이에 뾰족한 나뭇가지로 스크래치를 하면 예쁜 무지개색이 나오는 책이다. 라떼는 스케치북에 알록달록 색칠하고 검정으로 덮어서 직접 만들었던 것이.. 세상 좋아졌다. 아이에게 스크래치북을 건네니 아이는 곧장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하트를 그리고, 구름을 그리고, 우리를 그려준다. 우리 이름을 어떻게 쓰냐고 물어보더니 삐뚤빼뚤 글자로 우리 이름을 써주기도 했다. 집중한 아이의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 한참을 쳐다봤다. 우리 눈에도 이렇게 예쁜 아이가 엄마에겐 얼마나 예뻐 보일까-.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우리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아이의 그림에 집중했다. 그렇게 20장은 되는 스크래치북을 단숨에 끝냈다. 다 쓴 종이들을 대충 버려둘 줄 알았지만 아이는 한 장씩 차곡차곡 모아 다시 상자에 넣는다. 집에 가면 남은 부분에도 그림을 그릴 거라고 했다. 내게 레인보우 스크래치북 한 권밖에 없었단 사실이 야속했다.


함께 앉아 이야기하다 보니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오늘도 피자와 콜라로 끼니를 때웠을 모녀를 그냥 보낼 수 없어 근처 은행에 달려가 현금을 뽑았다. 이 활동을 하면서 우리의 작은 원칙은 현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꼭 필요한 데 쓰이길 바라고 건넨 돈이 술이나 마약 등을 구매할 때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매정하고 차가운 세상에서 하루라도 인간적이고 따뜻한 저녁을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진실로 아이를 사랑하는 그녀의 눈빛을 믿었다.

- 진심인가요? 내가 이걸 받아도 되나요?

- 그럼요. 장 봐서 아이랑 따뜻한 저녁식사하세요.

재차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그 돈을 받아 들었다.

- 건너에 있는 마트에서 장 보려고요. 저녁으로 먹을 따뜻한 음식도 사고, 애가 좋아하는 간식도 사야겠어요.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엄마는 너무 고맙다며 또 눈물을 뚝뚝 흘린다. 이번엔 그 눈물이 마냥 슬퍼 보이지만은 않아 다행이었다.


아이와 엄마는 우리를 꼭 안아주었다. 아이는 헤어지기 아쉬운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안겨왔다. 분명 날이 무섭게 추웠었는데, 어느새 추운 것도 잊고 있었다. 아이가 스크래치북에 삐뚤빼뚤 써준 우리 이름이, 그 엄마가 눈물로 전한 고마움이, 우리를 꼭 안아준 품이 따뜻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미련 가득한 인사를 마치고 기쁘면서도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한다. '그 모녀를 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앞으로 남은 겨울은 어떻게 지낼까,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 걸까-.' 홈리스 피플을 만나다 보면 오늘 하루 도움이 되었다는 기쁨보다 지속가능한 도움을 주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더 크게 남곤 한다. 오늘 그들의 저녁이 부디 포근하고 행복하길 상상하며 아쉬운 맘을 달랠 수밖에.


이후 몇 주간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어 근처에 지날 때마다 돌아서 그쪽으로 가보곤 했지만, 그들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그 자리에 나오지 않은 것이 그들에게 잘된 일인지 안된 일인지 알 수없지만, 일이 잘 풀려 더 이상 길거리에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진 것이길 바랄 뿐이다. 홈리스 피플을 만나며, 다음 달에 다시 만나자는 인사는 하지 않는다. 다음 달엔 이곳이 아니라 좀 더 안락한 곳에서 지낼 수 있길 바라니까. 오랜 시간 이 활동을 하면서 바뀌지 않는 현실에 무기력해지는 순간도 있지만 무너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을 단숨에 바꿔주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일상은 하루의 작은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기에. 외로운 사람들에게 함께 하는 순간을 만들어주고, 힘든 사람들에게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순간을 만들어주기 위함이다. 그 작은 순간들이 쌓여 빛을 낼 타이밍을 그저 조용히 바라고 기다린다. 아이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올해 다가올 겨울은 좀 더 따뜻한 겨울이길 바란다. 길 위에서는 다시 만나지 않길. 어딘가에서 꼭 잘 지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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