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단편 소설집
읊조리는 듯한 대화로 사실과 캐릭터를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자는 어떤 자다. 라는 단정적인 서술 없이, 은은하게 '어떤' 자인지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감탄했던 많은 문장들 중, 식당에서 옆 테이블에 앉은 가족을 묘사하던 장면이 가장 인상깊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였는데, 큰아이가 떼를 쓰고 작은아이가 울기시작하자 남편이 아내에게 응 너는 그러니까 애들이 우는데 그걸 응 아니 제대로 했어야지 응 하며 공격한다. 그 불화를 읽어낸 아이는 더 서럽게 울어대고 아내는 입을 꾹 닫은 채 큰 아이를 등에 업고 식탁근처를 오가며 달랜다. 주인공에게 일련의 사건이 발생한 뒤 다시 그 식당에 갔는데, 그 자리에 이번엔 젊은 커플이 와있다. 음식이 나오자 남자가 '오오' 하며 감탄하고 그들은 서로 다정한 말을 나눈다. 주인공은 그 광경을 보며 결국엔 모두가 저렇게 미쳐가는 것일까 하는 짧은 생각을 한다.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을 때, 작년 말 쯤 시간이 늦어 손님이 거의 없었던 지하철에서 봤던 부부가 떠올랐다. 남자는 들어서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무언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노약자석에 자리잡고 쉴새없이 아내를 쪼아댔다. 여자는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폭력에 체념한듯 입은 굳게 다물고 허공과 남자쪽을 번갈아 가며 응시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이 공포인지, 수치인지, 후회인지, 분노인지 그 미간을 통해서는 읽을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지하철역 몇 개를 지날 때까지 쪼아댐은 이어졌고 남자쪽의 언성이 점차 높아지더니 같잖은 수준을 벗어났다. 마침내 내가 개입하더라도 오지랖의 영역이 아님이 확실해졌다. 속으로 행동양식을 다듬고 노골적으로 시선을 보내며 몸을 돌려 앉았다. 결국 여자의 주도로 그들은 다음 역에서 내렸다. 그러나 일방적인 폭력의 현장이 플랫폼 벽면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 행위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열차는 곧 출발하였고 난 자책해야하는지 슬퍼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편 지난 번 대학 동기들과의 술자리가 생각난다. D는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데 본인은 손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남자가 밖에서 큰 일을 하고 오는데 스스로의 행적에 대해 실시간으로 보고할 필요는 없는거 아니냐며 웃었다. 시대감각에 맞지 않는 과장된 이야기에 그자리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고, '큰 일'은 그 날 우리 술자리의 주된 농담의 소재였다. 형은 담배피는거 여자친구가 뭐라고 안해? 아, 남자가 큰 일 하다보면 좀 필수도 있지. 그걸 뭐라고 하면 되겠냐? 아 맞네 그렇네 하하하.
웃을거 다 웃고 돌아오는 길에 조금 섬짓해졌다. 이런 농담이 진짜 익숙해지고 주변에 많아지면 진짜 '저런 것'이 맞는 것인줄 알고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은 소설을 읽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를 가르쳐줬다. 방심하는 순간 언제고 삶의 때가 짓겨들어 지닌 가치관이 병들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지하철의 그 남자를 보고도 잘못된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되고, 술자리에서 차별적인 농담을 주도적으로 재생산하게되고, 식당에서 아내의 인격을 깎아내리게 될 것 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모두에게도 나름의 할 말은 있겠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라는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소설을 읽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