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리치 Mar 29. 2020

엄마한테 가방을 선물 받았다

어느 불효녀의 고백


지난 주말, 집 소파에 웬 가방이 하나 놓여 있는 걸 봤다.


"엄마, 가방 사셨어요?"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물어본다. 기쁜 마음이다.




우리 엄마는 알뜰살뜰한 살림꾼이다.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있어 허투루 물건을 사는 일이 없다. 그게 우리 가계 경제에 큰 보탬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이제는 조금 속상하다.


엄마가 여행을 갈 때 마땅히 입고 갈 옷이 없어 고민하는 것도 속상하고, 아빠 옷이나 신발은 자주 사면서 엄마 물건은 열 번 이상 고민하고 사는 것도 속상하다. 엄마는 다 불필요하다고 하시는데 어쩌다 한 번 필요한 순간이 찾아오니 문제다. 매번 그 순간을 이렇게 저렇게 토스하며 불필요한 소비를 스킵하시는 데 도가 튼 것 같다.   


새로운 가방이 반가운 건 그래서였다. 엄마가 오랜만에 스스로를 위한 소비를 한 것 같아서.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다.


"아 저 가방 ㅇㅇ아줌마가 고맙다고 선물로 준 건데 내가 들고 다닐 일이 없네. 내일 엄마랑 같이 매장에 한 번 가보자 딸!"


얼마 전, 코로나 때문에 자가격리 하셨던 엄마 친구분께 식료품이랑 생필품을 바리바리 챙겨 현관 앞에 두고 오셨는데 엄마 친구분이 너무 고마워하며 가방을 선물하셨다고 했다.

엄마가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하자 자기도 필요 없다고 그럼 딸이라고 갖다 주라며 가방을 던지다시피 주고 가시더란다. 철저하게 실용주의인 우리 엄마는 그 가방을 보며 '일 년에 몇 번도 안들 텐데 너무 아깝다'라고 생각하다가 매일 같은 가방을 메고 집을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떠올리셨다.


엄마에겐 비밀인데 내 집에는 고이 모셔 둔 명품 가방이 있다.


격식 있는 자리에 들고 갈 가방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하나 둘 사 모았는데 격식 있는 자리에 참석할 일이 별로 없다.

모처럼 좋은 자리에 외출했다가도 마지막 목적지가 대부분 부모님 집이다 보니 엄마 눈치가 보여 늘 편한 가방(똑같은 가방)을 들고 다닌다. 그 모습이 엄마에겐 짠해 보였던 것 같다. 갑자기 마음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하다. 없는 와중에도 딸을 생각하시는 엄마 보기가 부끄럽다.

집에 가방이 있다는 말도 못 하고 나도 한사코 거절해보지만 엄마는 엄마대로 완강하다.


결국 다음날 엄마와 같이 가방 매장을 찾았다.

 

엄마는 딸이 마음에 들어하는 가방이 꼭 있었으면 하는 눈치이고 양심 없는 딸은 또 예쁜 가방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서 이 가방 저 가방 메어 보며 때아닌 패션쇼를 열어보고 엄마와 내 마음에 쏙 드는 가방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유리문을 나선다.


비싼 가방은 집에 장식해놓고 늘 저렴한 가방만 들고 다니다가 모처럼 반짝반짝한 가방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니 주책맞게 발걸음이 가볍다. 가방이 참 마음에 든다고, 엄마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엄마한테 사치품을 선물 받는 건 무척 오랜만이라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기분이 팔랑거린다. 엄마도 딸에게 선물하는 기분이 사뭇 좋다며 행복해하신다. 엄마 마음에 차오른 뿌듯함을 보며 이것도 효도라고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돈 벌어서 효도하겠다는 공수표를 마구 날리면서.


집에 오자마자 비닐을 뜯고 만지작 거리며 어깨에도 메고 예쁜 곳에 두고 사진도 찰칵찰칵 찍어 엄마에게 보낸다.

텅 빈 가방 안에 엄마의 사랑을 꾹꾹 눌러 담았는지 가방이 제법 묵직하다.

이제 엄마의 사랑을 매일매일 메고 다녀야지. 엄마의 기쁨을 가득 담고 다녀야지.


늘 받기만 하는 딸은 오늘도 엄마를 이기지 못했다.


엄마의 소소한 행복을 내가 대신 들었으니 다음엔 나의 소소한 행복도 엄마한테 대신 들려 드려야겠다.


엄마의 넘치는 사랑에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는 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벽 5시, 119를 불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