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에서의 경험
지난달 가입하게 된 독서모임은 그 경로가 일반적이진 않았다. 당근마켓을 통해 가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아이패드 병'에 걸려 그리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물론 밀리의 서재 전자책 읽기와 노션으로 일정관리, 브런치로 글쓰기를 한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긴 했지만) 중고 매물을 찾기 위해 당근마켓을 열심히 스크롤을 내리던 때였다.
인기 있는 제품답게 판매 게시글 수는 꽤나 많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6개월 전 구입해 개봉만 하고 사용하진 않은 미사용 새 제품!'이라는
'음주운전은 했지만 술은 안 마셨습니다'급 소개글도 짜증을 보탰고,
분명 중고 제품임에도 신제품을 사는 가격과 차이가 없는 게시글 등의 범벅이었기 때문이다. 가끔가다가
'오 이건 괜찮은데?' 하는 조건일 경우에는 여지없이 그 버튼이 붙어있었다. '거래 완료'.
결국 30분 동안 그저 그런 조건의 판매 게시글만 실컷 본 뒤 나는 항복을 선언했다. 아이패드 구매를 포기한 것이다. '그래 어차피 아이패드 곧 신제품 나올 시기 아닌가? 지금 샀다가 후회하느니 오히려 잘 됐어'라며 합리화를 했다.
30분간의 시간낭비를 하느라 상처받은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당근마켓의 '동네생활'탭에 올라온 글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제 오후에 역 주변에서 에어팟 한쪽을 분실했다는 글, 자주 가던 카페에 새로 일하게 된 아르바이트생이 얼마나 무개념 한 지 비판하는 글, 의도가 불순해 보이는 같이 술 마실 사람을 구하는 글... 그러다 나를 홀리듯이 잡아 끈 그 글을 목격했다.
그건 얼핏 보면 굉장히 평범한 독서모임 멤버를 구하는 글이었다.
독서모임 인원 모집해요!
평일 오전 6시 반마다 줌으로 모여서 30분간 소감을 온라인으로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인 독서모임 구인 글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거다. 장담한다. 게다가 6시 반에 모임을 하려면 6시에 기상을 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그렇지만 이 모임에서 다음 주부터 같이 읽을 거라는 선정도서가 너무나도 내 마음에 쏙 들어서 홀린 듯이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책은 엠제이 드마코의 '언스크립티드'였다.
이 작가의 전작 '부의 추월차선'은 나를 멀쩡한 직장에서 퇴사하게끔 만들었다. 항상 믿어왔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매운맛 팩트 폭력을 한 바가지 퍼붓는 책이었다. 처음에는 책의 내용이 너무 과격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읽었지만 책을 덮을 때 즈음 어느덧 작가의 팬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같은 작가가 쓴 이 책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조만간 한 번 읽어야지'라 생각했지만 그 '조만간'은 좀처럼 오는 법이 없었다. 독서를 꽤나 좋아함에도 자꾸 미루게 되는 내 게으른 모습을 보면 사업가로서의 내 길은 아직도 멀었구나 생각이 들어 부끄러움을 느끼던 찰나에 이 독서모임 인원 모집 글을 발견한 것이다.
아무래도 모임이 있으면 나태한 나를 다잡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독서모임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간단한 면접(?) 비슷한 문답을 진행한 후 카카오톡 오픈 채팅 링크를 전달받아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사람은 열 명 정도 있었고, 연령대가 꽤 있었다. 주로 30대 중반이 가장 많았고, 많게는 40대 중후 반도 있었다. 의례적인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네~ 환영합니다'와 같은 인사말을 주고받은 것 외에 추가적인 대화가 더 오고 가진 않았다.
독서 모임 진행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했다. 매일 책의 정해진 부분을 읽어온 후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발언시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략 한 사람 당 2~5분 정도 짤막하게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식이었다. 깔끔한 진행방식과 함께 '부의 추월차선'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생겼다는 이유 등으로 독서모임에 대한 애정이 깊어져 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연히 참가하게 된 이 독서모임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황홀한 꿈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나를 이 독서모임으로 초대한 모임장으로부터 개인 톡이 온 것이었다.
주말에 주로 뭐하세요? 이번 주말 시간 되시나요?
연락의 의도는 토요일에 강남에서 드림보드(나의 꿈을 이미지화해 사진으로 기록하는 보드) 만들기 행사를 하는데 같이 참여하면 좋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뭐야? 그냥 온라인 독서모임인 줄 알았는데 오프라인 행사도 하나 보네?'
마침 독서 모임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터라 사람들이랑 친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강남이라는 조금 먼 거리의 모임 장소가 부담이라 고민 중이었다. 고민 중인 나를 눈치챘는지 모임장은 한 마디를 보탰다.
"오시면 좋을 거예요!
이 모임 원래 만드신 분이자 경제적 자유 달성하신 분도
이번에 나와서 강연하시거든요~
제가 특별히 강연 자리 티켓팅 해드릴게요!
인기가 많은 강연이라 금방 매진이에요!!"
음??? 잠깐.. 그냥 독서모임인데 뭔 강연까지 해? 이상한데?? 게다가 별로 잘 알지도 못하는 날 위해서 인기 강연의 티켓팅을 해준다고? 굉장히 수상한데??
그도 그럴게 온라인으로 얼굴 몇 번 본 게 다일뿐인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건 과잉친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음 진짜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너무 세상을 꼬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아닐까? 이 사람이 정말 좋은 의도를 가진 친절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내가 책에 대한 소감 말하는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었나? 하...내 매력이란...' 과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강연하는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내 입장에서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의 강연을 들으러 왕복 3시간을 이동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과 유튜브 강연을 통해 내 집에서도 볼 수 있는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정말 내가 평소에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가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이렇게 대답했다.
"좋은 기회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강연보다도 실행이 중요한 시기라서 고민되네요. 더불어 저는 주체적인 삶을 꿈꾸고 있기에 티켓팅을 부탁하는 것도 불편합니다. 연사님 성함을 말씀해주시고 티켓팅 사이트를 알려주시면 제가 관련 정보를 확인해보고 결정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온 정보는 내 의심을 해소하기는커녕, 증폭시키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넷 검색을 해도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는 없고 동명이인들만 수두룩하게 나왔고, 티켓팅 사이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티켓팅을 하냐고 물으니, 워낙 좋은 뜻에서 하는 강연이라 오프라인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만 오픈한다는 것이다. 근데 그런 자리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날 부른다고? 모순이다. 미심쩍은 게 많아 더 캐고 싶었지만 이러다간 싸움이 날 수도 있겠다 싶어 대충 좋은 핑계로 둘러대고 참석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번엔 근처에서 커피나 한 잔 하자는 이야기로 또 연락이 왔다. 애초에 당근마켓으로 알게 된 사이라 서로 동네도 가깝겠다 잠깐 짬을 내서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카페에서의 만남은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그가 처음부터 내민 명함에는 다단계로 유명한 업체 이름이 찍혀 있었다. 나보고 네트워크 마케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미 독서모임 때 이야기했지만 나는 다단계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지는 않다는 솔직한 내 의견을 내비쳤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그 안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난 실제로 내가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피라미드 위에 있을 수 있다면 이상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단점이지만.
그는 본인이 안티에이징 제품 관련 사업을 한다고 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다단계 회사라 마케팅 및 판매만 담당하고 있을 걸 잘 알지만 모르는 척 물어봤다.
"오 그러면 제품을 직접 생산도 하시는 건가요?"
그는 경제적 자유에 대해 '로버트 기요사키'의 책들에 나오는 내용과 '레버리지', '부의 추월차선'에 대한 내용들로 한바탕 떠들어댔다. '레버리지'라는 개념을 이용해 생산은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본인은 마케팅 및 판매를 담당한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말이지만, 과연 그게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위탁판매와 어떤 큰 차이가 있을까 의문이 들어 질문을 수차례 이어나갔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오히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아 괜찮아요~ 처음에는 이 개념을 이해하기 좀 어려울 수 있어요~ 저도 사업 시작하고 몇 년 동안 잘 이해가 어려웠었거든요"
물론 나도 사업이나 비즈니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요즘 내 관심사가 온통 이 분야라서 이곳저곳에서 보고 들은 내용으로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사업을 몇 년 동안 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대화를 하면 할수록 밑천이 드러났다. 분명 경제적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던 사람인데, 구체적으로 사업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즈니스 주제에서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을 자꾸 돌리고 회피했다.
결국 내 물음표 공격을 참다못한 그가 KO를 외쳤다.
"사실 저보다도,
이 사업에 대해 더 잘 설명해 주실 수 있는
이 분 강연을 듣는 게 이해가 빠르실 거예요~"
결국 기승전강연, 이번에 강연하는 곳에 와서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보라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실제로는 다단계 상품의 제품 소개와 사업설명회, 나에 대한 세뇌가 목적인 강연이라는 걸 대화하면서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직접 설득하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더 '말발'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려는 거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방향이 같아 마지막으로 짧은 대화를 더 나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에게 물었다.
"아무리 좋은 강연이어도 저와는 맞지 않을 수가 있잖아요? 강연을 들어보고 저랑 안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해도 모임은 너무 좋거든요. 모임은 계속 지속할 수 있을까요?"
그는 의외로 꽤나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이 모임 자체가 생긴 이유가 그런 사업을 같이 할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서라...."
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즉 사업을 같이 하지 않을 거면 모임을 나가라는 암시였다.
이 말은 두 가지 부분에서 나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하나는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독서모임의 실체가 사실 다단계 인원을 모집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방에 참가하고 있던 나 이외의 대부분(혹은 아마도 전부)의 사람들이 이미 다단계 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이었다는 거다. 이제야 퍼즐이 좀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무료로 그렇게 훌륭한 퀄리티의 독서모임이 유지되고 있었는지, 왜 일반적인 독서모임에서 다루는 소설책 등이 아닌 '경제적 자유'등과 같은 성공에 대한 책들을 선정도서로 이야기하는지.
그렇게 나의 '당근마켓'에서의 짧지만 강렬했던 인연의 마침표가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