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타고난 재능이 없는 아이 중심으로
미국에 오기 전 우리 큰딸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바이올린을 접했다. 7살 때 동네 피아노학원을 다니긴 했지만 바이올린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방과 후수업에서 처음 배우게 되었다. 예체능은 일찍 할수록 배우는 속도가 빠르고 몸이 기억을 하니까 어른이 되어서 다시 하더라도 빨리 익힐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늘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예체능을 많이 배우지 못한 한이었던 것도 같다. 방과 후 수업에 바이올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등록을 했었다. 내가 중학교 때 너무 좋아했던 뮤지션이 일렉트릭 바이올린을 켜는 바네사메이였는데 이런 엄마의 사심으로 우리 딸은 그렇게 첫 발을 내디뎠다.
당연히 바이올린은 8살에게 버거웠던 것 같다. 우리 딸은 음악적 재능이 그다지 있지도 않았고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것 자체가 벌서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한 학기를 듣고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었다. "선생님 진이가 바이올린이 너무 힘들대요. 아쉽지만 진이는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 온 답장은 너무도 의외였다. "어머님, 진이는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는 아이예요. 꼭 포기하지 마시고 시키셨으면 좋겠어요!" 진이가 켜는 바이올린을 들어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의 말에 확신이 가진 않았지만 진이에게 그 문자를 보여주었다.
"진아, 너는 바이올린을 정말 잘하는 아이래. 바이올린 전문가이신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정확할 거야. 우리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한 학기만 더해보고 그만두는 건 어때?"
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리하겠다고 했다. 본인도 선생님의 소질 있다는 말에 적잖이 놀란듯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쭉 7학년이 된 지금까지 바이올린을 해오고 있다. 그때 선생님의 문자에 나는 어디에 진이의 영재적 모먼트가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왜 그랬는지 더 이상 질문을 하지도 않았고, 진이 역시 그 문자 그대로 희망을 가지고 여태껏 현을 놓지 않고 이어온 것이다. 늘 생각하지만 성장기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일생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참으로 스승의 역할은 고귀할 따름이다.
그렇게 바이올린을 하던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마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 것이다. 초등 5학년은 워싱턴주에서 중학교(6학년)가 되는데 입학 전 처음 학교 구경을 시켜주는 오픈하우스에 갔더니 오케스트라 부스가 열리고 단원을 모집 하고 있었다. 학부모 발런티어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 지원팀이 있었고 아이가 바이올린을 해왔다고 했더니 신청서를 주며 작성하라고 했다. 워싱턴주 중학교는 정규 수업 시간에 오케스트라가 과목으로 선택된다. 오케스트라 또는 밴드를 할 수 있고 둘 다 안 하는 학생은 그 외 아트, 과학, 요리 등등 선택과목을 선택하게 된다. 그 말은 즉 오케스트라 수업을 매일매일 하게 되는 것이다.
인건비가 비싼 이곳 미국에서 개인레슨을 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기 때문에 학교 수업에서 최대한 열심히 하고 집에 와서 많이 연습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유튜브 반주를 틀어놓고 연습도 하고 새로운 곡도 찾아서 하곤 했다. 그리고 다행히 오케스트라 담당 선생님이 워낙 열정적이셔서 (미국은 선생님마다 편차가 큰데 감사한 일이다) 진이가 더 배우고 싶다고 부탁드리면 수업 끝나고 짬짬이 지도도 해주셨다.
사실 진이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는 아니다. 지금 오케스트라에서도 실력은 중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악기를 통해서 친구들과 협연하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즐기는 아이인 것 같다. 특히 처음에는 영어가 서툴러서 오케스트라 친구들과 대화도 잘 못하던 아이였지만 1년이 지나고 마무리 공연에서 깜짝 시상식을 했는데 친구들과 선생님의 투표 순위로 받는 영광의 year award도 받을 수 있었다.
진이는 음악 실력보다는 콘서트를 위해서 친구들과 함께 연습하며 돈독해진 우정이 더 큰 소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든 7학년이라 가끔 예민해지고 감정의 기복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방에서 혼자 자신이 좋아하는 바이올린 곡을 연주하며 기분을 풀어내곤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건강한 취미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푸는 멋진 어른으로 자라게 해주고 싶었는데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다.
미국은 실력에 대해서는 확실하다. 음악적 재능이 상당한 친구들은 오히려 학교 오케스트라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음악을 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가 따로 있다. 엄격한 오디션을 보고 들어간다고 한다. 진이에게 물었더니 본인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고 하였다. 친구들과 함께 화음을 만들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며 음악을 즐기는 지금 이 정도가 딱 좋다고 한다. 근처 고등학교 선배들 또는 초등학교 후배들과 협연을 하기도 하고 Feild Trip이라고 해서 동네 타운센터나 놀이동산에 가서 공연을 하기도 한다. (모두 정규 수업시간에) 음악을 즐기며 커뮤니티 안에서 이웃들과 나누는 문화가 있고 학교 측과 학부모들이 봉사를 하며 많은 노력을 한다.
여기에도 도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1년에 한 번씩 본인이 신청을 하면 전문가들 앞에서 연주를 하고 Grade와 피드백을 받아 자신의 위치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 또 All State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워싱턴주에 있는 공립 중학교 7, 8학년 오케스트라 학생들을 대상으로 오디션곡을 정해서 각자 연습한 다음 녹음을 해서 프로그램 디렉터에게 보내고 합격/불합격을 하게 된다. 합격을 한 학생들은 주말의 어느 한 날 한 장소에 모여 아침 일찍부터 화음을 맞추고 그날 오후 공연을 올리고 헤어지게 되는 행사이다. 올해는 Spokane이라는 워싱턴주 내의 작은 도시였다.
진이는 올스테이트 단원이 되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몇 주간 열심히 연습을 했다. 워낙 합격률이 저조하다고 해서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오디션 곡이 어려워서 연습을 하며 좌절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더니 학교 선생님께 부탁도 하고 한국에서 레슨 해주시던 선생님께 동영상으로 피드백을 받는 등 여러 가지 도움을 얻어 결국 합격을 하게 되었다. 아이가 중간에 너무 힘들어하니 잠깐이라도 개인레슨 선생님을 알아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긴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이루어내면 그건 오롯이 진이의 성과가 아닌 것 같았다. 스스로가 그렇게 느낄 것 같았다. 다행히 아이도 그런 부탁은 하지 않았고 스스로 넘지 못하는 것도 큰 경험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아이를 믿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합격을 하고 나니 아이가 더 성장한 것이 느껴진다. 자신이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다는 어릴 적 선생님의 그 말을 입증해 내는 것처럼 스스로가 점점 확신에 차는 모습이다. 예전에는 바이올린 연습 안 하니~ 잔소리도 많이 했는데 이젠 스스로 알아서 연습을 하고 더 어려운 곡을 도전한다.
실력 있는 레슨 선생님을 만나면 당분간은 월등한 실력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음악은 스스로가 해내야 하는 부분인 것 같다. 레슨을 받으면 단거리 경주는 잘할 수 있겠지만 본인이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는 아이는 장거리 마라톤 선수가 된다. 진이는 고등학교에서도 오케스트라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고등학생들의 수준은 엄청나기 때문에 그곳에서 버티려면 스스로가 동기부여되어 더 높은 목표로 향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올스테이트 공연이 끝나고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그런다. "엄마, 올스테이트에 가보니 정말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어. 우리 학교에서 나는 중간이었는데 여기서는 나는 꼴찌였어. 그래도 괜찮았어. 친구들이 알려주고 도와줘서 진짜 멋진 소리가 나고 재밌었어."
음악을 하며 누가 누가 잘하나 콩쿠르에 나가서 순위를 받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들과 화음을 이루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익숙하게 만드는 음악 교육.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기회를 찾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진이는 요즘 다음 달에 있을 오디션 곡을 연습 중이다. 교육구 주최로 열리는 이번 콘테스트에서는 전문가들이 나와서 피드백을 주고 학생이 원할 경우 Rating을 매겨주기도 한다. 물론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구두로 피드백만 받게 된다. 솔로로 참가해도 되고 친구들과 앙상블로 참가해도 되며 심지어 진이는 두 가지 모두 신청을 했다고 한다. 솔로로는 자신의 실력을 점검해 보기 위해서 신청했고 앙상블은 잘하는 친구, 초보인 친구들 모두 모여 넷이서 출전한다고 하는데 매일 하교 후 다 함께 연습 중이다. 잘하는 친구가 덜 잘하는 친구를 이끌며 곡을 완성해나가고 있다. 팀이름은 유니콘이라고 하는데 아이들이 어떤 하모니를 들려줄지 콘테스트 날이 벌써 기대가 된다.
오케스트라 활동이 가져다주는 이벤트들이 많아 우리 가족들도 모두 즐겁다. 동생들도 자주 콘서트를 보러 가고 언니의 연주 모습을 보며 꼭 오케스트라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음악을 즐기는 평생의 삶은 그 얼마나 풍요로울까. 공립학교 오케스트라는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보다는 음악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더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