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글자두
나는 생긴 건 좀 도시랑 어울리지 않게 생겼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광역시에서 태어나 자란 '도시남'이라 할 수 있겠다. 생전 농사일이라고는 모르며 자란 나에게 호주의 거대한 땅은 농사일을 배우는 학교이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놀이터, 돈을 벌게하는 일 터였다.
흙이라고는 놀이터 바닥의 모래정도만 밟고 자란 나에게 호주에서 하는 농사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려서 몸이 허약했던 나는 동생과 다르게 할아버지 과수원도 한번 안 가 봤었다. 어린 시절 조부모님은 의성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그래서 나 빼고 모든 사람은 과수원 일이나 농사일에 익숙하다. 물론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아버지는 농사일이 힘든 집이 싫어서 결혼하시고 대구로 나오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연로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사랑하셨다. 두 분만 시골에 두고 나온 것이 늘 미안 마음에 우리를 데리고, 농사 시기가 되면 당신의 부모님을 돕기 위해 고향으로 향했다. 나만은 예외였다. 그 시절 나는 어린 나이었지만, 수술을 많이 받았던 터라 방학이 되면 병원에 입원을 했고, 어머니와 꼼작 없이 병원에 있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혼자 집에 둘 수 없는 동생과 함께 과수원 일과 농사를 지으러 가셨다. 그렇게 나는 흙과 인연이 닿을 수 없었다.
호주에 도착한 후 바로 농장에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대도시에 살려면 한국보다 비싼 물가에 내가 마련한 돈으로는 며칠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농사일을 하는 동안 숙소는 제공받는 조건이고, 밥만 내가 만들어 먹을 수 있어서 형편이 어려울 때 할 수 있는 좋은 선택지였다.
농장은 인터넷으로 다녀온 사람들의 카페 후기 글을 보고 난 후 평이 좋은 슈퍼바이저라고 하는 담당 매니저에게 연락하는 방식으로 결정했다. 새 글을 보자마자 나는 전화부터 했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 워낙 정보력이 좋아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는 소문이 생기면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전혀 구 할 수 없으니, 그곳에 있는 슈퍼바이저는 친절하게 대하는 매니저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그중엔 양아치 같은 사람이 꼭 있다.) 나도 카페를 통해 매니저를 구했고, 그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 시절 나는 무모한 건지 용기가 있었는지, 전혀 지인도 없이 홀로 팀에 합류했다, 그 팀이 무슨 팀인지도 모르고 그저 일을 준다고 하니 전화 한 통하고, 그곳으로 간 것이었다. 나는 다행스럽게 좋은 팀을 만났지만 돌다리도 두 번씩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한다는 것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내가 농장에서 일할 때와는 달리 중간 관리자가 없이 한국인끼리 팀을 만들고, 팀 스스로 농장과의 계약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임금도 좋아지고 처우도 좋아졌다고 하니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끔, 아주 가끔 다시 가보고 싶어 진다.
호주는 광활했다. 차로 달려도 끝이 없는 포도밭, 산을 오르고 또 올라야만 도착하는 사과밭. 도시 가까이에 있긴 하지만 엄청나게 넓은 대지에 밭이 있으니 벌레가 너무 많아서 눈을 뜨기 힘든 딸기 밭처럼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그 종류도 다양했다. 끝없는 종류의 과일과 채소, 방목해서 키우는 양들까지 호주는 사람이 필요해도 한참이나 필요했다. (지금도 여전히 노동자는 부족한 실정이다.)
전혀 쉽지 않은 일이다. 농사일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해도 해도 적응이 안 되는 것 인지 모르겠다. 마치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느낌이 든다. 아침에 눈을 뜨고 헬스장에 가서 해야 해서 하고는 있지만 하면서도 집 가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주 똑같다는 말이다. 나에게 농사일이란 해도 늘지 않아 전문가가 될 수 없는 일 같았다. 그렇게 하기 싫었던 일을 그나마 내가 어린 나이에 호주를 갔기 때문에 농장에서 일을 해도 불만 없이 일을 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지금 다시 호주를 갈 수 있게 된다고 하면.. 과연 그 일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 못 한다.
포도 농사 철이라 가지 치기가 한창인 도시에 들어갔다. 컨테이너와 같은 조립식 숙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승합차를 타고 일하는 곳까지 운전해서 가면, 그 가는 길이 모두 포도 밭이다. 작은 언덕을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게 펼쳐진 농장의 모습이 보이는 정도였다. 입구에 농장 이름이 적힌 나무 간판을 시 나서도 한참이나 들어가야 창고 겸 사무실이 나오는 곳이다.
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는 사실 사철이 농사 철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 수확이 끝나는 짧은 1-2달을 제와하면 거의 일 년을 가꾸어야 된다. 그 덕에 한 겨울까지 사람이 필요한 곳이 포도 농장이다. 우리 팀은 베트남 사람이 매니저였다. 베트남 전쟁 이민자 2세인 그는 모국어가 영어라 영업을 하기 적합했다. 동양 사람에게 친절한 그는 정확한 세금에 잔돈까지 맞춰 주는 성격이었다. 그가 연결을 시켜주면 우리 팀은 숙소를 얻고, 자동차를 구입해서 그곳까지 출근 방법을 마련하는 식으로 움직였다.
수확이 끝난 농장에서는 포도 가지치기와 원 가지에서 나오는 줄기를 남기고 잘라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일은 단순 하지만 늘 고된 일과였다. 눈 뜨면 일하러 들어가고, 다시 눈 감으면 아침이 오는 식이었다. 그래도 호주를 생각하면 농장에서의 생활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나와 4살 차이 나는 형과 누나들 팀에 들어갔는 내가 막내라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상황이었다. 힘든 농장 일에 유일하게 힘이 되는 팀원들이었다.
그 시절을 지나고 나이를 먹고 나서는 한동안 흙 밟을 일은 없었다. 학업을 마쳐야 했고, 그다음엔 손에 분필이 들려있었다. 긴 시간 흙에서 떨어져 살고 있던 요즘, 반가운 이야기를 들게 되었다. 친구의 본가에 손이 모자라 자두를 따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자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즐거웠다. 행복했던 시절이 떠올라서였다.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농장에서 보낸 시간이 힘들었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나름의 시간이 행복했었던 것 같다. 사실 힘든 일은 금방 잊어버린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기억에서 잊힌다. 하지만 행복했던 시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신이 주신 선물이니까.
기쁜 마음으로 아침에 자두를 땄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랜만에 농장 일을 했다. 농장이라고 하기엔 규모작 작은 곳이었다. 뭐, 규모가 작다고 자두가 적게 열리진 않았다. 한참을 땄고, 새벽이슬과 땀으로 젖어버린 옷이 무거워질 때쯤, 수확이 끝났다. 하루만 따서 되는 일은 아니고, 내가 가더라도 내 친구는 남아서 매일 이 일을 반복해야 했지만 잠깐의 수확 시간은 나에게 그때 그 시절의 즐거움을 상기시키는 향을 냈다.
돈이 늘 부족해서 힘들었던 시절에 시간과 노동으로 맞바꾼 돈으로 생활하던 때는 힘들긴 했어도 건강한 행복이 있던 때였다. 매일 저녁 한국 사람들과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한식은 내가 혼자 인터넷을 찾아보고 만든 음식보다 훨씬 맛있었다. 심지어 한국 사람들과 같은 팀을 오래 해 온 동남아시아 친구 '론'은 우리 엄마만큼이나 한식 요리 솜씨가 좋았다. (다시다 열광자였지만)
한국에서도 자두나 마늘 밭에서 일을 하면 호주 농장에서 일하던 느낌을 받는다. 초록의 나뭇잎 사이 빨간 열매를 잡을 때나, 보슬하게 갈아엎은 흙 사이에서 찾아낸 희끗한 마늘 알갱이는 일하는 보람이 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어떤 일이든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당장에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당장에 이해를 하지 않아도 내 인생 전반에 녹아들어 양분이 될 수 있다.
세상에 천한 일은 없다. 그러니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꾸준하게 해봐야 한다. 모든 일에는 그 일 자체보다는 그 일 뒤에 나를 위한 근육이 붙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