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 같지만 크고 작은 신호들을 보낸다. '나도 좀 돌봐줘', '번 아웃되기 일보 직전', '안 들어주면 파업해버릴 거야.' 그걸 예민하게 알아차리면 좋겠지만, 종종 바쁜 일상에 갇혀 지나쳐 버린다.
첫째 아이를 낳고 몸이 만신창이가 돼서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재활운동을 시작했는데, PT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휴 몸이 뭐... 이 상태로 숨 쉬기도 힘들 텐데, 육아를 어떻게 하는지 놀라울 정도에요."
"아무래도 출산이 무리가 된 거겠죠?"
"음... 출산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긴 했겠지만, 10년 이상 서서히 몸이 망가진 것 같아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몸이 망가졌다니.그토록 오래 내 몸에 무심했다니.
지금까지 살면서 제대로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숨 쉬기 운동과 걷기 외에는. 몸이 마른 편이어서 더 그랬다. 주위에선 살이 왜 이렇게 안 찌냐고 걱정할 정도였으니, 운동을 할 생각도 다이어트를 할 생각도 안 해봤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다. 결국 출산을 계기로 내 몸은 파업 선언을 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나도 좀 살려 달라고.
아무튼 운동을 계기로 내 몸은 급속도로 좋아졌다. 목 통증과 어지러움도 사라지고, 계단을 오를 때 아프던 다리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운동을 하고 나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 믿으세요. 너무 좋아요" 하는 것처럼, "운동하니 너무 좋아요. 운동하세요" 나는 운동 전도사가 됐다.
임신을 하면서 운동을 쉬었다. 출산을 하면 첫째 때처럼 몸이 안 좋을까 봐 겁을 먹었는데, 다행히 둘째를 출산하고는 몸이 멀쩡했다. 문제는 남편에게 생겼다. 둘째가 태어난 후 한 달이 조금 지난 후부터 남편의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가려워 온몸을 긁고 몸 전체에는 붉은 딱지가 생겼다. 나는 가끔 발만 간지러워도 신경이 곤두서면서 예민해지는데, 온몸이 수시로 가려우면 얼마나 괴로울지 가히 상상도 안 됐다.
남편은 새벽에는 수유를 돕고, 아침에는 쉬지도 않고 일을 하러 갔다.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깨어 있을 때는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피곤해서 면역력이 약해져 두드러기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려움증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남편의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평소 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도 거뜬히 일하러 가던 남편이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바닥에 누워서 자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잠이 오는 구나 싶으면서도 평소와 다른 모습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들은 너무 많았다. 남편은 살이 빠지기 시작해 10kg이 넘게 빠졌고, 급기야는 체격이 큰 편이었던 남편이 왜소해보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해서 그래. 요즘 입맛이 없어선지 덜 먹었더니 살이 빠졌네. 결혼하기 전 몸무게로 가고 있는데 좋아해야 하는 건지” 남편은 합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지나고 나니 작은 변화에도 민감했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때는 나도 육아와 일에 정신이 없었다. 남편이 가렵다고 온몸을 긁고 있으면 그런 남편을 안쓰럽게 쳐다보는 것밖에는, 가끔 등을 긁어주는 것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사진 촬영을 하러 가벼운 트레킹을 한 날 우리는 깨달았다.
계단이 조금 많긴 했지만 바다를 따라 둘레길을 아주 조금 걷다가 돌아왔는데, 남편이 바닥에 주저앉아 힘겨워했다. 체력이 부족한 걸로는 내가 남편을 따라갈 수가 없는데, 나는 멀쩡하고 남편이 힘을 못 쓰니 당황스러웠다. 겨우 차까지 걸어온 후에도 남편은 한참을 출발하지 못했다. 약간의 탈수 증상 같기도 했지만 이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병원에 가 보자.”
남편도 그제서야 현실을 직시한 듯 말했다.
“내 몸이 개판이구나.”
몇 달 동안 병원에 가라는 걸 꿈쩍도 안 하던 남편은 그날로 바로 병원을 다녀왔고, 병원에서는 백혈구 수치가 높다고 큰 병원에 가보라고 의뢰서를 써줬다. 큰 병원에 예약을 한 후에도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다.
“왼쪽 목에 혹이 잡히는데 꽤 큰 것 같아.”
남편은 병원 진료를 앞두고 목에 혹이 잡힌다고 했다. 나도 오른쪽 목에 혹이 잡혀서 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약을 먹고 쉬면 괜찮아졌다. 이 역시도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다. 병원에서는 CT를 찍어보자고 했고, 우리 가족은 그 사이 속초여행도 다녀오고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검사를 받으러 갔다. 그리고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 평화롭기만 하던 우리 가정의 삶은 한순간에 깨졌다.
“림프종으로 의심이 돼요. 정확한 건 검사를 더 해봐야 하고요.”
림프종은 혈액암의 일종으로 모두 악성이라고 한다. 혹시 아닐 가능성은 없냐는 질문에 100%란 없겠지만 거의 확실한 것 같다는 의견이 돌아왔다. 의심과 추측이 현실로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울면서 진료실을 나가는 내게 의사는 덧붙였다.
“울지 마세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왠지 모르게 의사의 말이 다정하게 들려왔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절망이 아닌 희망을 붙들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 얼마나 많은 암 환자들을 봐 왔을까. 이제 시작 선에 섰으니, 얼마나 경주를 잘 할지는 조금 더 달려봐야 알겠지.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혈액종양내과 의사는 당일 이비인후과 진료 예약을 바로 잡아줬다. 암이 얼마나 퍼졌는지를 확인하는 PET CT 일정도 잡아줬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걸 보면서 안도감이 들면서도 그만큼 위급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 만난 이비인후과 의사는 오늘 당장 입원해서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남편은 다른 일정이 없는지를 확인했고 의사는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했다. 그래,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게 없지. 왜 그동안 그렇게 외면하고 미뤘을까.
조직검사 결과는 림프종 확진. 림프종은 세부 아형(Subtype)이 서른 가지가 넘을 정도로 많은데 아형은 정확히 진단되지 않았다. 호지킨 또는 T세포로 초기 진단이 나왔는데, 호지킨은 림프종 중에서 예후가 좋고, T세포는 안 좋은 편에 속한다. 가장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이라니. 탄탄대로에 시험지를 하나 건네든 기분이었는데, 그 시험지가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