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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Sep 15. 2023

나도 '여행작가'가 될 수 있을까?

지구 반대편에서 글 쓰며 여행하는 법


여행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여행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세계를 방방곡곡 누비고, 찬란한 경험을 일삼으며, 그 시간을 책에 담아 세상에 공유하는 그런 멋진 일을. 그리고 그 행복한 일로 돈을 벌기까지 하는 호사를!


나 역시 이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내가 여행 중에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글로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여정을 마치고 나면 나도 여행작가의 삶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으며 여행 중에도 꾸준히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여행하며 글을 쓴다는 것


낯선 도시를 구경하고 즐기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짬을 내서 글까지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만일 '여행'을 1순위로 둔다면 나 역시 쫓기듯 글을 쓰며 스트레스를 받을 게 분명했다. 따라서 나는 이번 여행을 '출장'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짧은 여행 대신 한 달 동안 한 곳에 머문다는 장점을 살려 매일 정해진 시간을 업무에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번 여행을 준비한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은 여행 칼럼과 차기작을 쓰기 위해서 꼭 필요한 여정이기도 했다. 게다가 단체를 운영하고 있는 만큼, 지구 반대편에 있다고 해서 업무와 100% 동떨어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짐을 싸면서도 노트북을 가장 먼저 챙겨 들었다. 언제 어디서건 일을 하기 위해서.


물론 혼자만의 여정이 아니니 여행 메이트인 M의 동의를 먼저 구해야 했다. "나는 오전에 글쓰기와 업무에 집중하고 싶어. 대신 파리의 오후라면 이미 한국 기준으로 저녁이 훌쩍 넘은 시간이니, 방해받을 일 없이 마음껏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아. 괜찮을까?" 내 말에 M은 선뜻 동의를 보냈다. M 역시 진행하고 있는 사이드 프로젝트가 있어 업무 시간을 빼둬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일-여행 병행하기'라는 또 다른 과제에 직면하게 됐다.




여행 중 글쓰기 체험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 이전, 한창 열심히 여행을 다니던 시기에는 작가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할 일도 없었다. 가끔 영감을 주는 것들이 있으면 혼자 메모장에 끄적거리긴 했으나, 이를 여행기로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여행지에서 대단하고 엄청난 교훈을 찾아낸 사람들만 여행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되면서, 그런 마음의 벽도 하나둘씩 허물어졌다. 더 단순하게 생각해 보기로 한 것이다. 여행하면서 꾸준히 글 쓰는 작가가 여행작가 아니겠는가. 비록 이를 통해 큰 수확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타지에 머물며 글을 쓴다는 설렘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활자로 남길 수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구 반대편에서 주 5회 글을 연재한다는 게 너무 무리한 계획은 아닐까, 내심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가뜩이나 여행은 원래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걸 지난 숙소 교환 사태로 뼈저리게 느낀 후였다. 예기치 못하게 펑크를 내게 된다거나, 새로운 환경에서 글쓰기에 집중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행스럽게도 파리로 떠나기 전에 '여행 중 글쓰기'를 미리 경험해 볼 기회가 생겼다. 중국에 머물고 있는 친구에게 초대를 받게 된 것이다. 이참에 여행과 글쓰기를 효과적으로 병행하기 위한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조식을 먹고, 호텔방에 혼자 앉아 글을 쓴 뒤, 졸음이 몰려올 쯤이면 짧게 운동을 하고 다시 글을 쓰다가, 오후가 되면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는 식이었다.


비록 여행할 시간이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중국에 머무는 딱 일주일의 시간 동안 이런 루틴에 익숙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글을 오래 붙잡고 있다고 해서 술술 풀리는 것도 아니니까, 오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법을 익혀야지'라고 생각하면서.




글 쓰기 참 좋은 나라에 살고 있었구나


망했다! 글이 써지지 않았다.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다는 말처럼, 나는 한국을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한국이 글쓰기 참 좋은 나라였구나! 펜이나 타자기를 이용해 글을 쓰는 아날로그형 작가였다면 인터넷의 소중함을 이렇게까지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겠지만, 맞춤법 검사기와 네이버 사전, 각종 검색 기능을 애용하는 21세기 특화형 작가에게 인터넷의 부재란 치명적이었다.


중국의 인터넷은 한국처럼 고르지 않았고, 그마저도 브런치나 네이버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VPN 프로그램을 작동시켜야 했다. 게다가 나는 브런치에 거의 매일 글을 업로드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곤란했다. 한글 프로그램에 작성한 다음 브런치에 붙여 넣어 올리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이미 적어놓은 토막글들이 모두 브런치스토리 내 작가의 서랍 안에 남아있는 탓에 그것도 다소 애매했다. 브런치에 올릴 글은 브런치 안에서 작성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결국 나는 브런치로 글을 쓰면서, VPN이나 인터넷 연결이 끊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1분에 한 번씩 강박적으로 저장 버튼을 눌러댔다. 가끔 연결이 고르지 않을 때면 끊임없이 로딩 중이라는 화면이 떴는데, 처음에는 눈이 빠지도록 굴러가는 동그라미를 바라보았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 "제발, 제발!"을 외치면서. 그러나 그런 일이 하루에도 수없이 벌어지자,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그저 편안하게 눈을 감고 마치 그리스인이 된 듯 되뇌는 것이다. 마감의 신이여, 정녕 이렇게 저를 버리십니까?




차분한 글쓰기를 위한 고군분투


불안정한 인터넷 외에도 또 한 가지 난관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환경의 변화였다. 글쓰기는 개인의 집중도와 기분에 따라 생산성이 현저하게 달라지는 업무다. 그래서 환경이 바뀌면 글이 막히는 경우도 흔하다. 특정 환경에서만 글이 써진다는 작가도 많다. 마감이 닥쳐올 때는 늘 카페에 가야 한다거나, 아예 호텔에 한 달 머물며 책을 쓴다는 식이다.


나는 커피값도 숙박비도 없는 무명작가이기 때문에 늘 방 안에 틀어박혀 같은 자리에서 글을 쓰는 게 익숙했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4~5시간씩 꼼짝도 하지 않고 일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나중에는 아무리 같은 집 안에 있어도 내 방 책상 앞을 벗어나기만 하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호텔에서 글을 쓰는 건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호텔에는 일상의 근심이 없어 오롯이 글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한 작가의 말을 들은 뒤부터 쭉 그랬다. 그러나 청년희망적금과 근로장려금에 의존해야 하는 나의 입장에서 호텔 집필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랬던 내게, 처음으로 호텔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로망과 많이 달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깔하게 정리되어 있는 호텔방 한가운데 멀뚱멀뚱 앉아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차분하게 글을 쓰기 위해서 고군분투해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방 안에서 글을 쓸 때에 비해 속도가 반으로 줄어버렸다. 공간이 바뀐다는 게 집필 활동에 이렇게 큰 영향을 주다니. 아니, 겨우 공간이 바뀐 것 가지고 이렇게나 집중을 못 하다니! 이런 게 작가 자격 미달 아닌가?




나를 어르고 또 달래고


잠자리를 심하게 가리는 사람이라면, 평소 자기 전에 매일 같은 향을 베개에 뿌리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베개에 똑같은 향을 뿌리고 눈을 감으면 낯선 곳에서도 익숙함을 느끼며 비교적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는 거였다.


어쩌면 글쓰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모든 환경이 달라져도, 비슷한 점을 하나라도 만들어낸다면 집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고민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집에서 글을 쓸 때 자주 들었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보기로 한 것이다.


효과는 놀라웠다. 음악을 틀지 않은 첫날에는 글 한 편도 완성하지 못한 것에 반해, 둘째 날에는 적어두었던 초안 하나를 글 한 편으로 완성해 낸 것은 물론, 새로운 글을 기획부터 작성까지 한방에 끝내버리고 다음 편의 기획까지 마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나를 어르고 달랜 끝에, 중국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무사히 마감을 지킬 수 있었다.




영감은 왜 날아가는가


새로운 도시에 가만히 앉아 풍경을 둘러보면, 머릿속에 절로 영감이 떠오른다. 가끔은 스쳐 지나가는 것들 중 글로 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마음이 조급해지기까지 했다. 여기도 영감, 저기도 영감이었다. 나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부리나케 핸드폰을 켜서 메모를 했다. 떠올랐을 때 바로 적어두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지난 몇 번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감이란 찰나에 스치는 구름 같아서, 발견하기가 무섭게 점점 멀어지다가 다음날이 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순간의 구름이 얼마나 몽실거리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록해 두지 않으면 막상 글을 쓰기 위해 앉았을 때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어찌나 빠르게 사라지는지, 가끔은 내 뇌가 나를 농락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따라서 자세히 기록하기 힘들 때에는 단어라도 던지듯 적어두었다. 상하이, 골목, 식당 앞, 자전거 같은 식으로. 이렇게 단편적인 조각들로 내가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생각하면서. 그렇게 조금씩 여행 중 글 쓰는 법을 배워갔다.




물론 나는 아직 여행작가가 아니다. 열심히 여행기를 적는다 한들, 이를 풍성한 한 권으로 엮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여행을 글로 남기고, 그 글로 돈을 벌어 다시 여행을 떠나는 꿈같은 선순환을 나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사진과 영상을 넘어 그 순간의 마음까지 기록하는 법을 익혔다는 점이다.


14시간의 비행을 거쳐 도착한 지구 반대편에서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려본다. 지금은 비록 책상도 없는, 비좁은 포르투갈의 호텔 한편에서 옹색하게 글을 쓰고 있지만, 언젠가 멋진 여행작가가 되어 이날을 떠올리며 웃음 지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여행작가라는 꿈을 이룰 때까지 써나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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