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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Sep 22. 2023

돈도 시간도 되는 일도 없지만, 일단 떠나요!

엉망진창 꼬여버린 여행을 풀어내는 법


젊은 날에는 시간이 많지만 돈이 없고, 나이가 들면 돈은 있지만 시간은 없다고 했던가. 나는 슬프게도 돈과 시간이 모두 없는 젊은이였다. 일찍이 돈 되지 않는 비영리활동에 눈을 뜬 덕분에 일은 남들의 배로 하면서도 돈은 남들의 반도 벌지 못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올해도 역시나 근로장려금 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매일 12시간 이상 일하고 있는데도 난 여전히 저소득자였다. 더 열심히 근로해 보라며 국세청이 보내준 30만 원을 넙죽 받았다. 이 돈이면 파리에서 몇 끼는 해 먹을 수 있었다.




시간과 돈이 둘 다 없어요


파리 한 달 살기를 준비할 당시, 나는 공교롭게도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00명 규모의 비영리 행사를 총괄했고, 브런치에 주 5회 글을 연재하고 있었고, 차기작을 계약하기까지 했다. 수면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취미였던 프랑스어 공부마저도 놓아버려야 했다.


'이번만큼은 단 하나도 놓치는 것 없이 꼼꼼하게 짐을 싸겠다'던 다짐도 지킬 수 없었다. 출국 직전까지 각종 프로젝트를 이끌어야 했기 때문에, 2시간 만에 5주 치의 짐을 대충 추려 캐리어에 던져 넣고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출국을 12시간 앞둔 전날 밤까지도 각종 미팅과 회의에 매달렸다. 정신 차려보니 비행기 안이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떠나야 하냐고. 이렇게나 시간과 돈에 쫓기는 사람이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나 있겠냐고. 하지만 숨 막히게 바쁜 시간 속에서도 우울과 번아웃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여행 덕분이었다. 다시 지구 반대편으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과정을 글로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든든하게 지탱해 주었다.




인천공항에서 7시간을


여행은 시작부터 그리 순탄치 않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달려온 것이 무색하게도 비행기가 연착된 것이다. 어느 정도의 연착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무려 3시간이 넘게 미뤄졌다는 안내를 받자 좌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유 있게 떠나고 싶어 이륙 3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한 우리에게는 갑자기 6시간이라는 공백이 생겼다.


체크인 카운터가 열리는 시간도 3시간 미뤄졌기 때문에, 5주 치의 짐이 가득 들어있는 캐리어 4개도 고스란히 지니고 있어야 했다. 결국 M과 나는 공항에 있는 식당과 서점, 약국을 전전하며 힘겹게 3시간을 버텼다. 그리고 카운터가 열리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가장 먼저 달려가 줄을 섰다.


그런데 체크인 도중 낯선 질문을 받았다. "두 분 다 영어를 할 줄 아시나요?" 영문도 모른 채 그렇다고 답하자, 항공사 직원이 우리에게 넓은 비상구 좌석을 주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경유지인 이스탄불까지는 무려 11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에, 넓은 좌석에 앉아 갈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특혜였다.


비상구석에 앉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추가금을 지불할 여력이 되지 않아 포기했었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비록 비행기가 추가로 연착된 탓에 인천공항에서 7시간 가까이 머물러야 했지만, 비상구석에 앉을 수 있다니 아무래도 좋았다. 무거운 캐리어를 먼저 보내고 나니 마음도 편안해졌다.




이뤄질 때까지 놓지 않는다면


여행 내내 같은 향수를 뿌리면, 그 향을 맡을 때마다 언제든 여행을 생생하게 추억할 수 있다는 한 배우의 인터뷰를 본 적 있었다. 여러 감각 중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게 후각이니까, 눈을 감고 그 향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었다.


마침내 위시리스트에 아주 오래 머물던 향수가 있었다. 너무 갖고 싶지만, 100ml에 50만 원이라는 사악한 가격 탓에 구매는 꿈도 꾸지 못했다. 사치품에 큰돈을 쓸 자신이 없어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지우기를 2년간 반복해 왔으나, 파리에 한 달이나 머무는 이번만큼은 '원하는 도시에서 원하는 향수를 뿌리는 꿈'을 이루고 싶었다.


나는 며칠 내내 인터넷 면세점에 출석도장을 찍으며 포인트를 긁어모았다. 때를 기다리는 맹수와 같은 마음이었다. 면세점 어플에 매일같이 들락거리던 어느 날,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톰포드 향수 40% 세일'! 나는 지금까지 모았던 포인트를 모두 털어, 결국 원하던 향수를 반값에 쟁취했다. 꿈은 반드시 이뤄지는 거였다. 이뤄질 때까지 놓지만 않는다면!




11시간 뒤에 만나요


면세점에 들러 수령한 향수를 소중히 품에 안고 탑승 시작 시간에 맞춰 게이트에 도착했다. 이코노미석에 탑승하려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줄을 서있던 찰나, 또 다른 사건이 또 발생했다. 승무원이 게이트 앞에서 방송을 시작한 것이다. "송혜교 님과 M님을 찾습니다!"


무슨 큰일이 난 걸까? 혹시 아까 부쳤던 수하물에 문제라도? 부리나케 달려간 우리는 의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지상직 지원의 실수로 인해 우리가 받은 비상구석이 다른 탑승객과 중복됐다는 거였다. 어쩐지, 너무 뜻밖의 행운이었지. 비상구석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한 우리는 비상구석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원래대로 좌석 두 개를 나란히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만석이라 두 분이 같이 앉아 가실 수 없어요." 5~6시간도 아닌 11시간의 비행인데, 내내 동행과 떨어져서 보내야 한다니. 심지어 근처도 아니고, 아예 다른 칸의 머나먼 자리 두 개였다. 항공사에서 이륙 직전에야 실수를 발견한 탓에 손쓸 틈도 없었다고 했다.


허술한 절차와 일방적인 통보를 납득하기는 힘들었지만,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미 3시간 넘게 지연된 데다 우리의 짐이 실렸을 테니 다음 비행기를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은 좌석을 선택하기 위해 새벽같이 달려와 가장 먼저 체크인을 한 거였는데, 시작부터 여행이 꼬여버렸다.




이스탄불에서 12시간을


비행기에 탑승한 뒤로도 1시간가량이 더 연착되어, 결국 우리는 예정보다 4시간 늦게 경유지인 이스탄불에 도착하게 되었다. 12시간 만에 드디어 여행메이트 M과 재회한 것이다! 하루 정도 이스탄불에서 레이오버를 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숙소로 이동했다.


본래의 계획은 오후 5시쯤 이스탄불에 내려서 저녁 식사를 하며 신시가지의 아경을 구경하고, 다음날 오전에 구시가지를 관광하고 낮 1시 비행기를 타는 거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관광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탁심 광장 인근에서 문을 연 레스토랑을 발견해 늦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튀르키예 전통 음식을 먹었는데, 정말 맛있어서 접시를 싹 비웠다.



내일 포르투갈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해야 했다. 이스탄불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딱 12시간 남은 셈이었다. 1시간 동안 식사를 마친 뒤, 남은 11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궁리했다. 아무래도 5~6시간은 잠을 자는 데 보내고,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관광을 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와인이 엎어졌어, 오히려 좋아!


나는 차곡차곡 무너지는 계획을 그저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다. 이 낯선 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마치 누군가 비웃기라도 하듯 내가 세워놓은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으니까. 인천공항에서 7시간을 보내게 될 줄은, 11시간 동안 혼자 비행해야 할 줄은, 이스탄불의 야경을 하나도 보지 못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집념 덕분인지, 엄청난 야행성인 답지 않게 새벽 다섯 시에 두 눈을 팍 떴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공기와 멀리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숙소 근처의 동네를 차분하게 둘러보고, 해변가를 산책했다. 아침 일찍 여는 식당을 찾아 카이막을 바른 빵을 먹었고, 필수 코스라는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도 구경했다.




여행은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에 갔다가 와인벼락을 맞게 되었다. 종업원이 서빙을 하다 실수로 내가 마시던 와인잔을 엎어버린 거였다. 와인이 쏟아지며 내 발과 샌들을 온통 적셨고, 나는 서둘러 티슈로 테이블과 발을 닦았다. 신발을 망쳐서 어쩌냐며 걱정하는 M에게 나는 이렇게 답했다. "괜찮아. 마르겠지!" 양말에 운동화가 아니라 맨발에 샌들을 신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종업원이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며, 작은 병에 새로운 와인을 가득 따라 갖다주었다. 이미 잔에 든 와인을 반 이상마신 상태였는데, 갑자기 와인 두 잔이 추가로 생긴 거였다! "와인 엎어져서 오히려 좋네! 걸을 때마다 향기도 좋고!" 그런 이야기를 하며, M과 공짜 와인을 나눠 마셨다. 무려 발의 뽀송함을 내어주고 얻어낸 와인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물론 예산도 계획도 날씨도 중요하겠지만, 사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라고 이야기해 본다. 비행기가 연착되더라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더라도, 갑자기 비가 내리더라도 슬퍼하지 않는 마음.


운이 좋게도 비 내리는 도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샌들에서 은은한 와인 향기가 나게 되었다고, 비록 나란히 앉아 가지는 못했지만,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고. 그렇게 나름의 좋은 면을 찾아가며, 내게 주어진 여행을 오롯이 즐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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