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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Oct 20. 2023

딱 한 달만 파리에서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낭만과 사랑의 도시에서요!


얼렁뚱땅 헐레벌떡 떠나온 프랑스 파리 한 달 살기. 우여곡절 끝에 집을 구하고, 전재산을 털어 항공권을 마련하고, 결국 파리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내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도, 아직은 실감 나지 않았다. 내가 이 도시에 한 달이나 머물게 되었다니! 그렇게 나는 스무 살에도, 스물두 살에도 나를 반겨주었던 낭만의 도시 파리에 발을 내디뎠다. 내 젊은 날을 이 도시에 남겨두고 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나의 프랑스어 무료 독학기


사람마다 하나쯤은 끌리는 언어가 있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 항상 프랑스어였다. 제대로 된 프랑스 영화나 드라마조차 본 경험이 없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한결같았다. 내게 프랑스어는 마치 나긋한 속삭임이나 노래처럼 들렸다. 특히 피아니스트 조성진에게 '입덕'한 뒤부터는 그가 프랑스어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며 열정을 불태웠더랬다.


그렇게 나의 야심 찬 도전이 시작되었다. 이름하야, 공짜로 프랑스어 배우기 프로젝트! 내게는 학원비가 없었지만, 보는 사람마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집념이 있었다. 그날부로 언어 공부계의 <수학의 정석> 같은 존재라는 듀오링고 어플을 깔았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처음에는 소년, 소녀, 사과 같은 쉬운 단어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주어진 문제를 틀릴 때마다 하트(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하나씩 깎였는데, 줄어드는 하트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내게 주어진 하트는 5개뿐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에는 5번의 기회를 모두 날리고 허망하게 어플을 종료하기도 했다. 하트 하나를 다시 받으려면 5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유료 멤버십을 결제하면 하트가 무한히 주어지고, 성가신 광고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내게는 돈이 없었고, 집념만 있었다!




3년 동안 광고를 보는 여자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5분씩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하트가 다 떨어질까 조바심을 내며, 수없이 쏟아지는 광고를 묵묵히 견디며! 심지어는 라섹 수술을 한 다음날에도 고통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반쯤 감은 눈으로 학습을 마쳤다. 어플 속 달력에 기록되는 나의 학습일지를 보고 있자면, 마치 칭찬스티커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몰두하게 됐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무려 1308일. 3년 반이 넘도록 광고를 보며 무료 기능만을 고집한 셈이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끈질긴 집념이 아닐 수 없다. 원어민과 대화할 기회도 없이 어플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나의 프랑스어 무료 독학기는 계속됐다. 그리고 이렇게 공부한 시간들이 이제야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여행을 준비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한 달만 파리지앵으로 살기 위해서!




파리에 있는 우리 집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비싼 택시비가 아까워 울상이 지어졌지만, 소매치기의 천국인 파리에서 인당 가방 세 개씩을 들고 대중교통을 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멋진 오스만 양식의 건물 앞에 도착하자, 영상으로만 만났던 감독이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택시에서 내리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직접 내려와 1층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우리가 머물 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이었다. 한국식으로는 4층, 프랑스식으로는 3층. 집주인인 감독은 기꺼이 25kg에 달하는 내 거대한 캐리어를 번쩍 들어주었다! 그리고 4층에 도착하자마자 가쁜 숨을 내뱉으며 내게 이런 농담을 건넸다. "혹시 가방 안에 동생을 숨겨온 건가?"



그는 집안 곳곳을 소개해주었다. 욕실은 충분히 널찍했고, 방과 거실도 두 사람이 생활하기에 충분했다. 방 한 편에는 피아노와 책이 가득 꽂힌 수납장도 있었다. 내가 작가라는 걸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의 책장을 가리키더니 "책을 마음껏 읽어도 돼. 모두 프랑스어로 적혀있긴 하지만, 너는 프랑스어를 공부 중이라고 했으니까!"라며 웃었다. 그는 찬장에 들어있는 몇 가지 향신료와 조명을 켜고 끄는 법. 마지막으로 열쇠 사용법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준 뒤 손을 흔들며 떠났다.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괜찮아


"여기 진짜 우리 집이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여행메이트 M에게 괜히 한 마디를 던져보았다. 수많은 여행 중 처음으로,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점이 생기던 순간. 그 이름을 내뱉자 이유를 알 수 없는 포근함이 몰려왔다. 며칠 만에 서둘러 짐을 싸서 떠나야 하는 곳이 아니라, 진짜 집이 생겼다. 옷을 꺼내서 걸어두고, 칫솔을 꽂아두고, 냉장고를 채워둘 수 있는 그런 집.


평소와 같은 여행이었다면 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얼른 챙길 것만 챙겨서 나가자! 에펠탑까지 버스 타고 이동하고, 샹젤리제 거쳐서 개선문에 갈 거야!" 내게 주어진 시간은 보통 한 도시에 3박 4일, 길어야 4박 5일이었을 테니 알찬 여행을 위해 부리나케 숙소를 나섰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도시 곳곳을 구경하면서도 느긋하게 일상을 즐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으니까. 옷가지를 꺼내 헹거에 걸어두고, 가방조차 들지 않은 채 샌들만 걸쳐 신고, 가벼운 마음으로 바스티유 광장을 향해 나섰다.




또 다른 역사가 될 일상의 조각들

프랑스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바스티유 광장. 대혁명의 시발점이 된 역사적인 명소가 바로 집에서 1분 거리에 있었다. 그 옆에는 바로 센강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었다. 이런 집을 구하게 된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바스티유 광장은 혁명의 중심지라는 엄청난 역사를 뒤로 하고,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여유를 즐기는 쉼터로 자리 잡았다. 한때는 감옥이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50m를 훌쩍 넘는 기념비만이 탁 트인 광장 중앙을 지키고 있었다.


거대하고 웅장한 기념비는 이제 파리 시민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상의 한 조각이 된 듯 보였다. 광장은 언제나 삼삼오오 모여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학생들,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를 나눠먹는 어르신들로 붐볐다.


만일 에펠탑 근처에 숙소를 잡았더라면, 정해진 루트를 따라 철저하게 움직였다면 절대로 볼 수 없었을 풍경이었다. 바스티유 광장은 에펠탑이나 개선문, 라파예트 백화점 등 대표적인 관광지와는 조금 떨어진 곳이니까. 북적이는 광장을 걸으며,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파리에 도착해 가장 처음 산 것은?


여유로운 걸음 끝에 도착한 곳은 한인마트였다. 다른 것보다도, 김치와 라면을 사두기 위해서! 이전에 피렌체를 여행하다 예기치 않게 갑자기 아팠던 적이 있었다. 밤새 열이 오르고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그때 겨우겨우 꺼낸 말이 이거였다. "뜨끈한 국물에 김치를 먹고 싶어... 그럼 나을 것 같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국을 떠나면 그 어느 때보다도 한식이 그리워진다. 나는 평소 밥보다는 파스타를, 백숙보다 스테이크를 더 즐겨 먹는 양식 파인데도!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언제든 매콤한 한식으로 속을 달랠 수 있도록 김치와 라면을 장바구니에 가득 담았다.


다음으로는 집과 가장 가까운 마트, 까르푸로 향했다. 한 달 내내 우리의 주된 장터가 될 곳이었다. 까르푸에서는 각종 과일과 채소, 삼겹살과 와인을 샀다. 복숭아 여섯 개를 2천 원 정도에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동안 비싸서 못 먹었던 과일을 배 터지게 먹고 가야지. 거의 모든 식재료가 한국보다 조금 더 저렴했다.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생수 여섯 병을 들고 낑낑거리며 4층 계단을 올라, 열쇠로 문 세 개를 차근차근 열고, 장바구니에 담긴 것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다. 과일은 냉장고에, 감자는 식탁 위에 꺼내두고 와인은 미리 오픈해 두어야지. 마트에서 산 치약과 샴푸까지 욕실에 가져다 놓으니 제법 집다운 집처럼 보였다.


가장 저렴한 치약을 골라 산 탓인지 아무리 입을 헹궈도 텁텁한 맛이 남았고 젓가락이 없어 포크로 달걀말이를 먹어야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저녁이었다. 청춘을 간직하는 도시에서 보낼 한 달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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