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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Oct 27. 2023

파리에 왔지만 에펠탑은 안 봤습니다

에펠탑 뒤에 숨은 낭만을 찾아서!


언제였을까, 한 여행작가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파리에서 단 한 계절만 누려야 한다면 결단코 가을'이라고. 내가 경험했던 여름의 파리는 온통 핑크빛이었고, 겨울의 파리는 서늘한 푸른빛이었다. 파리의 가을은 무슨 색일까? 본격적으로 가을의 도시, 파리를 마주할 생각을 하니 쪼그라든 통장 잔고쯤은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낭만주의자에게 파리보다 더 좋은 도시가 또 어디 있겠는가.




'진짜'는 한 걸음 너머에 있다


과거 런던에서 여행을 하던 중 외국인 친구를 사귄 적 있었다. 그게 벌써 5년 전의 이야기인데, 지난 봄 그 친구를 서울에서 만났다. 그는 이전에도 두어 번 한국에 온 적이 있었는데, 이미 지난 여행을 통해 경복궁이나 남산타워, 광화문 같은 명소는 다 본 듯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 석촌호수를 택했다. 석촌호수도 제법 유명한 관광지지만,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아직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는 소문이 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침 벚꽃이 만개한 시기였던 데다, 석촌호수는 내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또 다른 명소를 찾기보다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호숫가에 있는 카페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나란히 앉아 와인과 맥주를 마셨다.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과 흩날리는 벚꽃 잎을 바라보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난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홍대랑 명동, 강남만 갔었어! 여기가 진짜 서울 같아." 친구는 다음에 또 오게 된다면 꼭 숙소를 이 근처로 잡고, 여기에 자주 와야겠다며 몇 번이고 감탄을 내뱉었다. 서울을 한층 더 좋아하게 되었다면서.




에펠탑 말고, 파리가 궁금해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지난 두 번의 파리 여행은 고리타분하기 그지없었다. 에펠탑도 구경하고, 개선문에도 올라가고, 샹젤리제 거리도 걷고 싶어서 마음이 분주했다. '파리에 왔다면 응당 해야 할 것들'을 향한 강박관념 탓이었다. 물론 그 속에서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여행을 해보겠다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모두가 가는 곳이라는 이유로, 그 도시를 대표하는 관광지라는 이유만으로 애써 찾아가는 건 그만두었다. 대신 에펠탑 너머의 파리에 조금 더 집중하기로 했다. 이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소박하고 일상적인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그래서 흔한 파리 여행 코스를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리고 이번 파리 한 달 살기의 모토를 이렇게 정했다. '평소처럼 하루를 살되, 그 배경이 파리'인 것처럼 지내자고.


그렇게 마음을 먹자, 일정이 놀랍도록 달라졌다. 파리에서 보내는 첫 일주일 동안 관광지에 가기는커녕, 도서관에 들러 글을 쓰거나 골목 곳곳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바빴던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어? 생각해 보니 우리 일주일 동안 에펠탑을 한 번도 안 봤어!"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에펠탑의 꽁무니조차 못 본채 일주일이 흐른 것이다.


파리는 에펠탑 말고도 볼 게 이렇게나 넘치는 곳이었는데, 두 번이나 이 도시에 왔으면서도 그 사실을 몰랐었다. 그동안 거대한 탑 뒤에 숨은 풍경을 모두 놓치고 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이 도시를 더 자세히 알아갈 수 있어서, '진짜' 파리를 이제라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파리에서 가장 환상적인 곳


만약 파리에서 딱 한 곳만 가야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펠탑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공원을 꼽고 싶다. 어느 한 공원을 콕 집어 말하는 것이 아니다. 파리 곳곳에 위치한 공원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랑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엄청난 조경이나 놀거리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넓은 잔디밭이 있고, 따스한 햇살이 있고,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수없이 보고 자랐기 때문일까, 너도나도 잔디 위에 덥석 뛰어드는 모습이 처음에는 굉장히 낯설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잔디는 순전히 사람들에게 여유와 휴식을 선물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그리고 파리지앵들은 그 어느 곳이라도 잔디만 깔려있다면 당장 누울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 흔한 돗자리조차 필요 없다는 듯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 날씨가 좋으면, 별다른 계획 없이 곧바로 에코백에 마들렌이나 바게트, 오렌지주스와 책 두어 권을 넣고 집을 나섰다. 자전거를 빌려 매일 다른 공원으로 향하고, 잔디밭에 드러누워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나도 털썩 주저앉거나 드러누웠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멍하니 앉아 공 던지며 노는 아이들을, 주인을 따라 잔디에 뒹굴거리는 강아지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을햇살을 조명 삼아 책 한 권을 펼쳐 읽으면 "천국이 꼭 이런 모습일까?"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보다 완벽하게 이 도시에 녹아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비타민D 결핍증


사실 내게는 비타민D 결핍증이 있다. 부족도 아니고 결핍! 알레르기를 알아보기 위해 피검사를 했다가 우연히 이런 결과를 받아 들게 되었다. "지금 알레르기가 문제가 아니에요. 부족 단계라면 그냥 비타민 잘 챙겨 먹으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이 정도면 비타민 주사를 맞아야 해요." 의사는 이 정도 수치라면 일상 속에서도 엄청 피곤했겠다며 주사를 처방해 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햇빛을 아예 받지 못하고 사는 것도 아닌데 비타민 결핍증이라니! "해를 피해 다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찾아다녀야 해요. 게다가 자외선 차단지수 50씩 되는 선크림을 온몸에 치덕치덕 발라버리면, 비타민D도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어요. 철갑을 두르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거예요. 햇빛을 너무 많이 받는 건 피부에 안 좋겠지만, 어느 정도는 꼭 쬐도록 노력하세요."


파리에서는 모두가 그 말을 실천하고 있었다. 시원한 나무 그늘이 있는 자리는 인기가 없고, 모두 햇빛이 쨍쨍 드는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햇빛을 이불 삼아 낮잠을 청하는 사람도, 책을 읽는 사람도 많았다. 평소 같으면 나무 그늘에 기대앉았겠지만, 이번에는 나도 선글라스를 끼고 쨍한 햇빛 속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따스한 햇빛에 몸이 노곤노곤하게 풀리는 게 느껴졌다. 가끔씩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저 멀리 춤추듯 떨어지는 낙엽이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러누워 햇빛을 쬐는 게 이리도 좋은 거였다니. 그렇게 한동안 지구에 몸을 기대어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완벽하게 평화롭고 빈틈없이 다정한 햇살의 손길을 만끽했다.




파리의 공원에 누워,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바쁘게 뛰어다니고, 수십 통의 통화를 하고, 노트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삶은 대부분 숨 가쁘게 바쁜 나날로 이뤄져 있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이런 날이 온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이렇게 흘러가듯 살 수도 있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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