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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Nov 04. 2023

소매치기의 도시, 파리에서 가방을 잃어버렸다!

CCTV도, 경찰의 도움도 없는 곳에서!


'누구나, 무조건, 언젠간 한 번은 털린다!' 파리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 말에 공감할지도 모른다. 그 악명이 오죽 높았으면, 파리에 간다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친구들이 입을 모아 이런 걱정을 보탰다. "소매치기 조심해, 다들 뭐 하나씩은 털려온다더라."


한국에서는 길거리나 카페에서 소지품을 도둑맞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상상하기 힘들지만, 사실 유럽 관광 도시는 대체로 늘 소매치기로 붐빈다. 특히나 파리는 그중에서도 소매치기의 성지에 가까운 곳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지난 몇 번의 유럽 여행에서 실오라기 하나 잃지 않은 채 돌아온 바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자신만만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에이, 괜찮아. 늘 그렇지만도 않아." 그때까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내가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리게 될 줄은.





도둑도 직업이 되나요


여행자들이 모여있는 한 카페에 올라왔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주머니를 털어가려던 소매치기를 붙잡고 "이건 내 지갑이야!"라고 외치자 "이게 내 직업이야."라는 태연한 답이 돌아왔다는 이야기. 실제로 파리에서 지갑이나 핸드폰, 심지어는 방금 쇼핑한 물품까지도 소매치기에게 내어준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이로 인해 파리에서 소매치기를 예방하기 위한 팁도 인기를 끌었다. 특히 무조건 힙색을 메야한다거나 핸드폰에 스트랩을 달아 몸에 연결해야 한다는 조언이 유명하지만, 사실 나는 이를 하나도 따르지 않았다. 안전장치를 해놓았다며 방심한 틈을 타서 힙색을 칼로 찢어 지갑을 가져간다든지, 핸드폰 스트랩을 잘라 훔칠 가능성이 늘 열려있기 때문이다.


경계심 넘치는 관광객처럼 보이는 것보다는 별 볼 일 없는 현지인처럼 보이는 게 훨씬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평범하고 수수한 옷차림에 짐은 최소화하고, 사람 많은 곳에서는 조금 더 신경을 썼다. 사실 에펠탑이나 개선문보다는 도서관이나 마트 훨씬 많이 들락거렸으니 평범한 유학생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덕분인지 소매치기 걱정을 덜고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불행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와


날씨가 좋아 가벼운 쇼핑과 관광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모처럼 관광객다운 마음가짐으로 멋진 셔츠도 꺼내 입고 머리에 드라이까지 마쳤다. 평소에는 안주머니에 대충 카드와 지갑만 쑤셔 넣고 다녔으나, 오늘은 가방도 꺼내 들어 이런저런 소지품을 담았다. 신나는 마음으로 늘 애용하는 공유자전거에 올라타 가보고 싶던 상점으로 향했다. 캡모자 하나를 구매하고 신나게 나오는 길, "흠, 이거 가방에 들어갈까?"라고 중얼거리다,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가방이 없다. 팔에도, 손에도, 그 어디에도. 놀랍게도, 상점에 들어갈 때부터 없었다! 평소에 워낙 맨몸으로 다니다 보니, 가방을 자전거 앞바구니에 넣어둔 걸 까먹고 몸만 쏙 내려버린 것이다. 가방을 털린 것도 아니고, 내 손으로 곱게 소매치기들에게 갖다 바친 셈이었다.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있나!


서둘러 상점 앞 주차장에 세워둔 자전거로 달려갔으나, 당연하게도 바구니 안 가방은 사라져 있었다. 가방의 존재조차 잊고 신나게 상점으로 뛰어들어가 10분 넘게 쇼핑을 즐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방 안에는 내가 큰맘 먹고 샀던 선글라스와 지갑을 비롯해 잡다한 물건이 가득 들어있었다.


한국이라면 어렵긴 해도 찾을 방도가 있었겠지만, 여기는 파리였다. 길가에 CCTV도 없고, 하루에도 수백 건의 도난사건이 발생하는 곳. 경찰에 신고한다 한들 찾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혹시 지갑이나 몇 가지 물품만 빼가고 가방만 쓰레기통에 던져놓지는 않았을까 싶은 생각으로 근처의 쓰레기통을 죄다 들여다보았지만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불찰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소매치기를 피해 다녀놓고는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리다니! 이렇게나 부주의하고 멍청할 수가!




그래도 여행은 계속된다


침울해진 마음에 숙소로 돌아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미 잃어버린 가방 때문에 남은 시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비록 잃어버린 지갑 안에 주민등록증을 비롯한 신분증과 카드가 다 들어있지만, 가장 중요한 여권과 핸드폰은 외투 안 주머니에 넣어둔 덕분에 안전했다. 만약 여권을 잃어버렸다면 꽤 골치 아파졌을 것이다. 주민등록증과 카드는 번거롭긴 해도 다시 발급받으면 된다.


가장 속이 쓰린 건 아끼던 생로랑 지갑이 내 손을 떠났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비싼 제품이라서가 아니었다. 스무 살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 처음으로 지갑이고, 워낙 물건을 오래 쓰는 성격인지라 이미 6년 넘게 사용하며 정이 잔뜩 들어있었다. 앞으로도 최소 5년은 거뜬히 더 쓸 거라고 마음먹었었는데, 이렇게 뜻밖의 사유로 지갑을 바꾸게 되다니.



예상치 못한 사건에 속상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으나, 그래도 훌훌 털어버리고 퐁뇌프 다리 위를 걸었다. 아름다운 생트 샤펠도 구경하고,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서점이라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도 갔다. 헤밍웨이가 파리에 살던 시절을 회상하며 쓴 책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으며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곳이었다. 이 서점의 단골이었다는 헤밍웨이의 숨결이 쌀알만큼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괜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서점 곳곳을 둘러보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


그렇게 하루 동안의 관광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마트에 들렀다. 아무래도 마트에 자주 오게 되었으니 회원카드를 만드는 게 낫겠다 싶어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인증번호를 확인하러 메일함을 열었다. 그런데 낯선 발신자명의 메일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 '파리 6구에서 당신이 잃어버린 가방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 찾으러 오세요.'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잃어버린 가방 속 지갑 안에는 주민등록증과 카드, 운전면허증 그리고 혹시나 명함지갑을 두고 나왔을 때를 대비해 딱 한 장만 넣어둔 내 명함이 있었다. 그리고 가방을 주운 사람이 바로 그 명함 속 주소로 메일을 보낸 것이다! 사실 지갑 안에는 타인의 명함도 두어 장 들어있었는데, 고맙게도 지갑 속 신분증과 명함 속 이름을 대조해 본 모양이었다.


주소를 검색해 보니 내가 가방을 잃어버렸던 자전거 주차장 바로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이름이 떴다. 부리나케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천사 같은 직원이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는 내게 가방을 건네주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파리에서는 가방을 절대 밖에 두면 안 돼. 항상 조심하는 게 좋아." 혹시나 누가 훔쳐갈까 싶어 본인이 발견하자마자 챙겨두었다는 말이었다. 나는 거듭 감사인사를 하며 가방을 건네받았다. 몇 시간 만에 운명적으로 다시 만난 가방 속에는 내 모든 소지품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나의 파란만장한 하루를 곁에서 지켜본 M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마감의 신이 너를 지켜보고 있나 봐. '혹시 여행이 너무 순탄한 탓에 글감이 떨어지지 않았니? 너에게 엄청난 소재를 내려주마.' 하며 하루만 고생시킨 거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소매치기의 도시라는 파리 한복판에서 잃어버린 가방을 고스란히 되찾다니. 정말이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이었다. 훔치는 사람도 있지만, 주인을 찾아 돌려주려는 사람도 있다. 그 따뜻한 사실을 되새기면서, 괜히 가방을 꼭 끌어안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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