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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Sep 29. 2023

여행 중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이거 혹시 꿈인가?" 영화 속에서나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황홀한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 순간 이곳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 지구 반대편의 낯선 풍경과 언어에 뒤덮여 있다면 그 생경함과 감동은 배가 된다. 운이 좋게도, 나는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이런 영화 같은 순간을 마주치게 되었다.

  



느긋함도 경험이니까


이스탄불에서의 험난했던 12시간을 마무리하고, 포르투갈로 떠났다. 이전에 계획해 둔 대로 포르투갈에서 일주일 정도 머문 뒤 파리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처음 가보는 나라에서는 꼭 수도를 들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자, 더 가고 싶은 도시가 어디인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수도 리스본이 아닌 해안도시 포르투로 가기로 했다.

                

포르투는 웬만해선 도보로 모두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도시였다. 여행 후기를 보니, 모두가 '2박도 괜찮고, 3박이면 충분할 정도로 작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3박이면 충분하다는 건 무슨 기준일까? 아무리 작은 도시라고 해도 3일 안에 '충분히' 만끽하긴 힘들지 않을까?

         

그 말을 따랐다가는 분명 블로그를 샅샅이 뒤져 명소를 조사한 다음 "렐루서점에 들렀다가 에그타르트 하나 사 먹고, 상벤투역에서 타일 벽 구경하고, 동 루이스 다리에서 석양을 본 다음 해물밥 먹으러 가자!"를 외치며 틀에 박힌 3일을 보내게 될 게 분명했다.


포르투의 멋진 골목길


'길을 잃어도 속상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싶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계속해서 다음 목적지를 찾아가기보단, "여기에 이런 골목이 있었어?"라는 반가운 발견을 하게 되는 그런 여행을. 지도를 보지 않고 동네를 탐방하거나, 느긋하게 공원에 앉아 햇살도 쬐는 그런 여유를 즐겨야지. 그런 느긋함마저 잊지 못할 경험이 될 테니까.

              



캐리어 둘 자리만 있으면 되는데          


내가 숙소를 고르는 법은 아주 간단했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서 지도를 맞춰둔 뒤, 가격 그래프를 왼쪽으로 쭉 당겨 10만 원 이하의 숙소만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방법으로 포르투 한복판에 1박에 8만 원짜리 숙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비록 리뷰는 썩 좋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내게는 별점 9점짜리 숙소를 잡을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사이트에 나온 사진을 보니 그렇게까지 나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몸을 눕힐 침대와 캐리어를 펼칠 정도의 자리만 있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쿨하게 결제를 마무리했었다.


리뷰가 좋지 않은 이유를 알아내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름만 호텔일 뿐, 방 안에는 에어컨, 냉장고, 그 흔한 옷걸이 하나 없었으며, 욕실 등은 나가기 직전이라 눈이 침침한 상태로 씻어야 했다. 결정적으로, 방이 너무 좁아 침대 옆에 캐리어를 펼쳐둘 정도의 자리도 없었다. 내가 원한 건 오직 캐리어 둘 자리뿐이었는데! 사전에 보고 온 사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호텔 사장님이 천재 사진가인 게 분명했다.



                   

장점은 찾기 나름이니까요          


이곳에서 일주일이나 머물러야 하는데, 시작부터 꼬이는 기분에 살짝 침울해졌다. 침대와 벽 틈에 엉거주춤 캐리어를 펼쳐 옷가지 몇 개와 세면용품을 꺼내고, 캐리어는 다시 고이 접어 세워두었다. 이대로 우울에 빠질 수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이 숙소의 좋은 점을 찾아야 했다!


어매니티가 없으나 우리가 챙겨 온 것이 있으니 괜찮고, 에어컨은 없지만 로비에 요청하니 친절하게도 선풍기를 내어주었다. 장고가 없다는 건 아쉽지만, 원래 물은 미지근하게 마시는 게 좋다고 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위치가 너무 좋았다. 작고 예쁜 문을 통해 좁은 테라스에 나가면 시청광장이 내 집 앞마당처럼 내다보였다. 포르투에 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른다는, 'Porto.'라고 적힌 시청 앞 상징물도 숙소 안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포르투의 메인 거리가 한눈에 들어오니 분명 야경도 예쁠 것 같았다.

          

"이만하면 뭐, 괜찮지. 1박에 8만 원 대였는데!" 그렇게 위안 삼으며 숙소에서 나섰다. 도시를 둘러볼 시간은 충분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느긋해졌다. 굳이 지도를 찾지 않고 산책하듯 동네를 돌아볼 생각이었다. 위치가 워낙 좋은 덕분에 어느 방향으로 향해도 어렵지 않게 멋진 장소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유명한 레스토랑에 찾아가는 대신, 골목을 어슬렁거리다 마주친 작은 가정식집에서 첫 저녁식사를 마쳤다.



                   

꿈속에 들어온 듯 완벽한 순간          


그렇게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도시를 거닐다 보니 아름다운 동 루이스 다리를 마주칠 수 있었다. 기타를 맨 사람들이 버스킹을 하고, 그 옆에는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서로를 끌어안고 웃고 있는 커플들 사이에 주저 없이 걸터앉아 강변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포르투갈에서의 첫 석양이 그렇게 졌다.

             

밤의 도시를 더 둘러볼 수도 있었지만, 여행의 시작점이니 너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숙소에 도착해 어두침침한 욕실에 들어섰다. 샤워부스가 너무 좁아 그 안에서 몸을 충분히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따뜻한 물에 피로를 씻을 수 있는 게 어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툭툭 털어냈다.



그렇게 욕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선 순간, 무언가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활짝 열어둔 테라스 문 사이로 아름답고 웅장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서둘러 테라스로 나가 밖을 둘러보자, 연주회를 보기 위한 사람으로 가득 찬 광장이 보였다. 구글에 검색해 보니, 시청광장에서 딱 하루 열리는 가을밤 연주회가 바로 오늘이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명성 높은 오케스트라의 엄청난 연주를, 방 안에서 듣게 된 거였다!             



  

나는 연주회에 가는 걸 좋아한다. 비록 통장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언제나 R석도 S석도 아닌 시야방해석을 택하긴 해도 그렇게나마 종종 문화생활을 즐기는 게 내게는 큰 기쁨이었다. 지금까지 꽤 여러 차례 연주회를 찾아다녔지만, 침대에 누워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살면서 우연히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는 순간이 몇 번이나 찾아올까? 선선한 초가을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선율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마치 내 인생에도 영화처럼 멋진 BGM이 깔리는 것 같았다. '여기가 이렇게 멋진 호텔일 줄은 몰랐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아름다운 음악이 자장가처럼 점차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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