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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Sep 08. 2023

파리에 있는 '유명인의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파리 한복판에 살고 싶을 뿐인데!


파리에서 한 달을 묵을 숙소까지 정해놓고 나니,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게다가 '집 교환'에 성공해 무려 400만 원을 아끼지 않았는가. 숙박비가 들지 않는 여행이라니, 자유여행자로서 이건 정말 괄목할만한 성과였다. 운이 좋게도 포르투갈에서 묵을 일주일 간의 숙소도 매우 저렴한 값에 예약할 수 있었다. 사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여행지 한복판에 있는 1박에 10만 원짜리 숙소가 좋아봤자겠지만, 지친 몸을 눕힐 침대와 캐리어를 펼칠 만큼의 공간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쌈밥 같은 인연


지나간 어느 여름날, 파리행 비행기에 혼자 올랐을 때 내 옆자리에 프랑스인이 앉은 적 있었다. 내 또래의 여성이었다. 내게는 아무에게나 말을 걸 정도의 붙임성이 없었고, 그가 영어를 잘하리라는 확신도 없었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와 대화해야만 하는 사건이 생겼다. 기내식에 쌈밥이 나온 것이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상추 위에 턱 하니 밥을 올려 입에 넣었는데, 머지않아 자리에 앉은 그가 상추를 손에 쥔 채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쌈밥 먹는 방법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쌈을 어떻게 싸는지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오, 하는 탄성을 내뱉더니 나와 똑같이 상추 위에 밥과 고기를 얹었다. 두 눈이 동그래지는 걸 보니 제법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기본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파리에 살고 있으며, 이번이 자신의 첫 서울 여행이었다고 했다. 서울은 정말 아름다웠고, 언젠가 다시 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파리는 처음이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딱 한 번 와본 적 있다고 답했다. 이번에는 딱 4일만 머물다 스위스로 넘어갈 예정이라고 말하자, 그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파리에 일주일 넘게 머물러도 부족할 텐데! 파리에는 아름다운 곳이 정말 많아." 내 생각도 그랬다. 지난번 파리에 갈 때만 해도 "파리의 크기는 서울의 6분의 1 정도로 작으니까, 짧게만 머물러도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계획을 세웠었는데, 막상 파리를 떠나며 지나간 여행을 돌아보니 어쩐지 제대로 본 게 에펠탑 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분명 파리에 다시 오게 될 거야." 그는 내게 확신에 찬 말을 내뱉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행기는 샤를드골 공항에 착륙했다. 여기저기서 한국인들이 부산스럽게 캐리어를 챙기고 있었고 나도 그 행렬에 동참했다. 그는 재미있는 여행을 하라며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비록 '쌈밥 같은 인연'은 거기에서 끝이었지만, 나는 그의 예언처럼 또다시 파리에 가게 된 셈이다.




숙소가 사라졌다!


그렇게 설레는 과거를 떠올리며, 파리에 가게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미리미리 정해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4개월 전부터 숙소와 항공편을 모두 확정해 둔 상태였다. 무려 한 달이나 머물 숙소가 정해졌으니, 이제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 출국을 두 달 앞둔 어느 날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파리 집 교환하기로 한 사람인데요...'라는 제목이었다. 불길한 마음을 안고 클릭하자, 예상보다 더 참혹한 내용이 등장했다. 예기치 못하게 본인의 비자가 취소되었고, 급하게 출국하게 되어 당장 집을 내놔야 한다고. 그래서 집을 교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미 그 사람과 일정을 조율해 왕복 비행기 티켓부터 파리에 가기 전 머무를 포르투갈의 호텔까지 모두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겨우 두 달 앞둔 상황에서, 우리와 일정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을 찾아 다시 숙소 교환을 성사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필이면 내가 파리에서 지내는 한 달이 파리 패션위크와 프랑스 럭비월드컵 기간과 정확히 겹치는 바람에, 이 기간에 파리에 있는 숙소란 숙소는 모두 씨가 말라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숙소를 다시 찾아 헤매게 되자 누군가 나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은 듯 기분이 가라앉았다.


나의 야심찬 숙소 교환 계획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갔고, 일반적인 단기 임대를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한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이트에 올라온 모든 단기임대 글에 연락을 돌렸지만, 하나같이 이미 예약 완료라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저희 집은 어떠신가요?


결국 반쯤 포기한 상태로 각 사이트마다 집을 구한다는 글을 올려두었다. 만일 연락이 오지 않으면 모든 계획을 취소해야 할 위기였다. 내게는 숙소비로 지출할 400만 원이 없었으니까. 역시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는 걸까. 어쩌다 선량한(?) 여행자인 나에게 이런 시련이 생겼나!


초조한 마음으로 며칠을 보내던 때, 또다시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아직 집을 찾고 계시다면, 저희가 단기임대자를 찾고 있는데요.' 임대용으로 내놓는 숙소가 아니라 실제로 거주하던 집인지라 굳이 적극적으로 홍보글을 올리지는 않았는데, 마침 가 올려놓은 글을 보니 집이 비어있는 기간과 딱 들어맞아 연락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메일에 담긴 집의 사진을 보니 눈이 번쩍 떠졌다. 침대도, 욕실도, 싱크대도 잘 갖춰져 있는 데다 큰 창을 통해 햇살이 잔뜩 들어오는 작은 아파트였다! 심지어 글을 쓸 수 있는 책상도 준비되어 있었고, 원래 교환하기로 한 집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비록 파리의 상징이라는 에펠탑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파리 중심부였고, 집이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도 가격이 우리의 예산과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파리 한복판에서 자는데 하루에 인당 3만 원 정도라니. 나의 사전조사에 따르면 이는 관광용 숙소가 아닌 현지인이 내는 월세와 비슷한 가격으로, 웬만한 호스텔이나 한인민박보다도 저렴한 금액이었다. 같은 기간을 호텔에서 머무는 것과 비교하자면 3분의 1 수준이라는 뜻이었다. 고로 나는 이 계약을 무조건 성사시켜야 했다. 이것이 나의 파리 여행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유명인의 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서로 간의 신뢰를 위해 집주인과 통화를 마치고, 세부적인 내용을 조율했다. 사실 실제 집주인은 그의 프랑스인 남자친구이며, 한국인인 자신이 한인 사이트에 대신 매물을 올렸다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집주인은 굳이 집을 내놓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집이 오래 비어있으면 좋지 않다는 여자친구의 설득에 동의해 한 달 이상의 장기 투숙객에게만 저렴하게 집을 빌려주기로 했다는 사연도 들려주었다.


나는 한 달간 머물며 차기작을 집필할 집을 찾고 있다고 답했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곳에 책상이 있어서, 집필하시기에 아주 좋을 거예요." 그의 답변에 한번 더 마음이 놓였다. 마지막으로 서로의 신분증을 교환할 차례였다. 그런데, 상대방에게서 여권 사진이 아닌 온라인 프로필이 도착했다.


그렇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프랑스인 집주인은 꽤 유명한 영화감독이었다. 안내받은 이름을 구글에 검색해 보니, 들으면 누구나 알만 한 영화의 제목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촬영 일정 탓에 몇 달간 다른 곳에 머물 계획이었고, 그동안 우리가 그의 집에 살게 된 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예술적인 소품으로 가득했던 사진 속 거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렴한 값에 집을 빌려주는 유일한 조건은 집을 적당히 깔끔하게 쓰는 것뿐이었다. 파리에 워낙 임대 사기가 많아 불안할 테니, 직접 만나 집을 확인한 후 돈을 줘도 된다는 배려는 덤이었다. 친절한 설명에 감격한 나는 내 네이버 프로필을 보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서로의 공신력(?)을 확인하며, 신분증 대신 프로필 교환을 마쳤다.




며칠 뒤, 집주인의 여자친구에게서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이미 갑작스러운 연락을 통해 숙소를 잃은 경험이 있던 나는 잔뜩 움츠러든 채 클릭했다. 또다시 계획이 틀어져 숙소를 구해야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여행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착한 메시지는 아주 의외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혹시 우리가 불안해할까 봐, 집 근처의 풍경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준 거였다! 문득 우리가 동네의 모습을 궁금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동네를 산책하며 영상을 찍었다고 했다. 상 속에는 집주인인 감독이 직접 등장해 동네를 간단히 설명해 주고 있었다. "집 앞에는 큰 광장이 있고요, 앞에 흐르는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금방 노트르담을 마주칠 수 있어요."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다정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숙소를 구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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