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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Sep 01. 2023

서울과 파리, 한 달만 '집'을 교환하실 분을 찾습니다

'로맨틱 홀리데이'처럼요


파리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미친 짓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 입출금통장에 단돈 10만 원도 남지 않게 될 거라는 걸, 어쩌면 적금마저 깨야할지도 모른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미친 고집쟁이였다. 결심한 것은 무조건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 다소 우아하지 않은 정체성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겠다.


나는 아끼고 또 아껴 쓰는 삶에 적응이 된 상태였다. '카드값 낼 돈이 부족하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삶이었다. 늘 있는 만큼만 절제해서 써왔고, 굶는 한이 있어도 빚을 진 적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번 여행이 끝나면 다음 달 14일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한 마디로, 나는 곧 카드값 낼 돈이 빠듯해 의도치 않게 무지출 챌린지에 참여하게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왕 빠듯하게 살아야 한다면, 파리에 다녀온 아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월세가 400만 원이요?


파리는 전 세계에서 집값이 가장 높기로 손에 꼽히는 도시다. 치앙마이나 발리와는 다르게 '파리 한 달 살기'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은 것에는 이 엄청난 거주비가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파리에서 한 달을 머물기 위해 에어비앤비를 뒤져보던 나는 이내 좌절감을 느꼈다.


그럭저럭 살만한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최소 400만 원에서 450만 원 정도를 줘야 했고, "오, 제법 괜찮은데?" 싶은 집은 달에 500만 원이 넘었다. 300만 원대 집도 종종 있긴 했지만, 제대로 된 침대조차 없어서 소파베드에서 자야 하거나, 변기가 집 밖에 있거나, 집이 너무 좁아 침대에 앉아서 밥을 먹어야 하거나, 화장실에 세면대가 없어 싱크대에서 손을 씻어야 하는 등 포기해야 할 것이 많았다. 300만 원이란 정말 큰돈인데, 이 돈을 내고 이렇게 지내야 한다니!


하지만 이게 파리의 현실인 듯 싶었다. 물론 현지 부동산에서 직접 발품을 팔아 집을 구하면 이것보다 훨씬 싸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만큼 값을 배로 치러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파리를 자주 오가는 외국인 친구가 "파리 에어비앤비는 사기가 많으니 조심해. 목돈을 냈다가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어."라며 무서운 조언을 해 주었다.


그러나 호텔에서 묵는다면 한 달에 500만 원 이상은 우습게 깨지니, 호텔을 예약할 수도 없었다. 파리 현지에서 부동산에 찾아가 겨우 한 달짜리 집을 찾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내 소박한 불어 실력으로는 택도 없는 일인 데다가, 애초에 한 달짜리 매물이 그리 흔할 리도 없었다. 진퇴양난의 순간이었다.




현지인처럼 살아보자


그래도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 정도의 장기 숙박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보를 수집하던 차에, 파리는 세입자의 단기 재임대가 합법이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구글에 'Paris one month rent', 'Paris apartment short term rental' 등을 끊임없이 검색하며 나오는 거의 모든 사이트에 다 들어가 봤다. 돈이 없으니 손품을 팔아야만 했다.


그 결과, 재불한인 커뮤니티에서 집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파리에 주재원으로 살고 있는 한국인이 많아 은근히 몇 개월 단위로 비는 집이 많다고 했다. 각 커뮤니티를 꼼꼼하게 뒤져보니, 집을 내놓는 사람과 구하는 사람이 모여 서로 조건을 맞춰가는 모습이 보였다.


결국 며칠에 걸쳐서 올라와있는 게시글을 모두 확인했다. 기한도, 위치도, 예산도 들어맞아야 했으니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다. 수백 개의 집을 보면서, 조건이 맞을 것 같은 집을 모두 모아 엑셀로 정리했다. 물론 서울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에어비앤비와 비교하자면 저렴한 집이 많았다. 300만 원 이하로도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우리 집이 비는데


한편, 나의 여행메이트 M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더 있었다. 바로 자신이 사는 집을 여행 내내 비워둬야 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M은 식물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5주간 집을 비울 생각을 하니 조금 곤란하다고 했다. 게다가 M의 집은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꽤나 비싸고 좋은 아파트였다. M은 서울과 파리, 두 곳의 높은 월세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 것이다.


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가 떠올랐다. 미국과 영국에 사는 두 주인공이 휴가 기간 동안 서로 집을 바꿔 살게 되면서 생기는 로맨스를 그린 영화다. 우리나라는 세입자의 재임대가 허용되지 않지만, 경제적 대가 없이 집을 바꿔 지내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서울과 파리, 한 달간 집을 바꿔 지낼 사람을 찾아보면 어떻겠냐는 나의 말에 M은 흔쾌히 동의했다. 자신의 집은 교통편이 좋으니 관광객에게도 적합할 것이고, 파리 숙박비를 아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했다. 대신 2주에 한 번 식물에게 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조건이 붙었다.




서울과 파리, 한 달만 집을 바꿔 살아요


M이 자신의 집을 내어주겠다는 큰 결심을 했기 때문에, 이를 알리고 사람을 찾는 것은 모두 내가 맡기로 했다. 우선 한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서울과 파리, 한 달간 집을 교환하실 분을 구합니다.'라는 아주 도전적인 제목으로! M의 멋진 집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적고, 우리가 원하는 숙소의 조건까지 달아두었다.


사실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되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기간을 완벽하게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드물뿐더러, 집을 바꿔 산다는 게 보통 결심은 아니니까.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연락처와 함께 글을 올려두자,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두 기간이 맞지 않거나, 우리가 원하지 않는 형태의 집이었다.


역시 모든 게 맞아떨어지기는 조금 어렵겠지. 내가 영화에 빠져 살았던 걸까? 아무래도 너무 무모한 시도였나 보군. 그런 생각을 하며 단념하고 있을 무렵,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집을 교환하고 싶은데요.' 파리 한복판에 있는, 우리에게 딱 맞는 집이었다! 오스만 양식의 파리 아파트는 아름다웠고, 파리에 사는 상대방도 M의 집을 엄청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렇게 세부 조건을 조율하고, 서로 여권 사본까지 교환하며 이야기를 마쳤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일정을 확정 지었다. 다른 나라도 둘러보고 싶다는 M의 의견을 따라 일주일은 포르투갈에서 보내고, 남은 한 달은 파리에서 보내는 루트였다. 파리에 거점을 두고 프랑스의 소도시도 차근차근 둘러보기로 했다. 상상 속의 여행이 현실로 성큼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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