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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Aug 18. 2023

갑자기 파리에서 한 달을 살자고?

직장인과 프리랜서의 프랑스 여행기


20대 초반 무렵 가진 돈을 여행에 모두 쏟아부은 뒤, 벌써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코로나를 겪으며 내 여행 계획 DNA는 싹이 말라버린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여행 준비를 하려니 낯선 것들 투성이었다. 여행을 계획하려면 언제, 어디로, 누구와, 어떻게, 얼마를 쓸 것인지 하나씩 결정해야만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바로 '누구와'였다. 세부적인 여행 계획 이야기에 앞서, 나에게는 영혼의 단짝 같은 '여행메이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겠다.  



여행메이트가 있다는 것


나의 여행메이트 M은 해외에 거주한 경험이 있으며 영어를 엄청나게 잘한다. 그래서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사기를 쳤다거나 기차 플랫폼을 찾을 수 없을 때,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구체적인 주문을 할 때 등 여행 중 각종 복잡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 능력을 빌릴 수 있다. 반면, M은 세부적인 정보를 찾고 계획하는 일에 약하다.


다행스럽게도 그 부분은 내 전문이다. 나는 숙소와 항공권을 비롯한 각종 정보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수집하는 편이고, 타고난 맛집 레이더가 있어 어떤 여행지에서든 맛있는 식당을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그래서 이 부분은 주로 내가 담당한다. 이렇게 각자 잘하는 부분이 다르니 함께 갔을 때 시너지 효과가 있다. 우리는 벌써 몇 번의 여행을 함께했다.


사실 여행메이트를 만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추구하는 여행 스타일이 어느 정도는 비슷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행기나 숙박은 저렴한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값을 조금 더 치르더라도 편안한 것을 추구하는지. 명소 앞에서 꼭 예쁜 인증샷을 남겨야 하는지, 아니면 그 시간에 골목을 둘러보며 분위기를 즐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사소한 것에서 분쟁이 시작되는 법이니까. 다행스럽게도 M과 나는 이런 면에서 여행 스타일이 어느 정도 비슷한 편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도 그 나름의 맛이 있다지만, 여럿이 가면 장점이 많다. 도미토리에서 자는 대신 집 하나를 빌릴 수도 있고 비행기에서도 심심할 틈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식당에서 여러 가지 메뉴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마음이 잘 맞는 여행메이트가 있다는 건 여러모로 든든한 일이다.




5주 동안 휴가 내는 직장인이 있다?


구체적인 여행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한 가지 문제를 꼽자면, 바로 M이 직장인이라는 점이다. 나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여행 스케줄을 잡는 일이 비교적 수월하지만, 직장인에게는 단 2주를 비우는 것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니까. 내가 한 달 동안 여행을 떠나는 계획에 대해 말했을 때, M은 '확신은 못 하지만 한번 도전해 보겠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며칠 뒤, M은 무려 5주간의 휴가를 승인받았다. 한 달도 버거우리라 생각했는데, 무려 일주일을 더 얻어낸 것이다. 물론 추석연휴와 개천절, 한글날, 주말, 회사 창립기념일을 모두 포함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직장인이 상상만 해보고 차마 지르지는 못 했던 그 일을 기어코 해냈다.


협업이 필요하지 않은 업무를 맡고 있어 자리를 비워도 팀원들에게 피해 줄 일이 없고, 평소 야근을 밥먹듯이 해뒀던 터라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한 달 동안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팀장님께 보고를 드렸더니 쿨하게 다녀오라고 하셨단다.


그렇게 M은 이 여행 계획에 자신의 일 년 치 연차를 전부 털어 넣었다. 단 하루도 남기지 않고. 가기 전까지 매일 야근을 해야 할 것이고 다녀온 후에도 엄청나게 고생을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저질렀다고 했다. 며칠 뒤, M의 회사에는 '5주 동안 휴가를 낸 사람이 있다더라.' 하는 소문이 전설처럼 돌았다. 프랑스인 바캉스 가듯 쉬는 일을 정녕 이 한국에서 해낸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한 달을!


M이 자신의 연차와 팀장님의 신임을 탈탈 털어 모은 5주의 휴가. 우리는 이 귀중한 5주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정말 제대로 즐기고 올 수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 한 가지 단어가 스쳤다. 아, 한 달 살기!


고작 한 달 가지고 '살기'라는 말을 쓰는 건 웃긴 일일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 년 열두 달 중 한 달은 꽤 긴 시간이니까. 이전에는 본 적 없던 것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꼭 가고 싶었던 식당에 힘겹게 찾아갔는데 문을 열지 않아 '이 도시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하며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돌리던 날들이 떠올랐다. 한 곳에 터전을 잡고 도시를 천천히 둘러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빠른 시간 내에 경험을 쌓는 것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곳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다면.


본격적으로 한 달 살기에 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포털사이트에 한 달 살기를 검색하면 보통 치앙마이나 발리에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한 달 살기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들이다. 아무래도 한 달이나 머물기 위해서는 저렴한 물가가 사실상 필수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흔히들 택하는 여행지인 뉴욕, 런던, 파리, 로마 같은 곳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가는 자칫 숙박비만으로 500만 원을 훌쩍 넘게 쓰게 될 수도 있다. 항공권까지 포함한다면, 현지에서 쓰는 생활비를 제외하고 이미 700만 원 가까운 돈을 지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럴 돈이 없었다.




왜 하필 '한 달 살기'인데?


우선 선택지를 줄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에서 한 달을 사는 건 너무 무모한 선택이었다. 아쉬움을 안고 떠났던 곳 중에서 골라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달 동안 머물러도 볼 게 넘치는 곳이어야 했다. 그렇담 프라하나 부다페스트처럼 작은 도시는 제외해야지. '며칠을 머물러도 이 도시를 충분히 즐기기엔 역부족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도시가 어디였더라?


그렇게 몇 가지 정보를 찾은 뒤, 확신에 찬 목소리로 M에게 말했다. "우리 파리에서 한 달 살자." 반면, M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한 달이면 못해도 도시 다섯 개는 갈 수 있는데?" 맞는 말이었다. 다섯 개뿐인가. 조금 무리하게 움직여 3박 4일씩 둘러본다면 거의 여덟 개의 도시에 갈 수도 있었다. 유럽 안에서는 나라 간 이동이 자유로우니까. M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혹은 발칸반도를 둘러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한 달 살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나라를 둘러보는 일은 단 2주만 주어져도 할 수 있지만,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즐기는 일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게다가 파리는 M과 나의 관심사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도시였다. M은 미술관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완벽한 선택지는 없었다. 예산을 아낄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만 있다면!




"파리에서 한 달을 보내면, 미술관이나 재즈바에 원 없이 갈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M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지독한 낭만주의자인 M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바게트도 엄청나게 사 먹을 수 있을 걸!" 이건 빵순이인 나의 희망사항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우리의 종착지는 파리가 되었다. 총 5주 중에서 첫 일주일은 M이 원하는 나라에 머물고, 남은 한 달은 파리에서 지내는 계획이었다.


정말로, 파리에서 한 달간 살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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