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와 사랑에 빠진 98년생의 글쓰기
Q.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단, 소속 없이 자신을 설명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98년생 송혜교입니다. 열다섯에 중학교를 자퇴했고, 스물다섯에 작가가 되었어요. 저는 하나의 소속보다는 다양한 정체성으로 똘똘 뭉친 사람인데요. 지난 11년 동안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비영리활동을 했고, 공공기관에서 교육 정책을 자문하는 일도 꽤 오래 했어요. 작사가나 강연자, 유튜버까지 다양한 직업에 도전해 오기도 했고요.
그동안 브런치스토리에 수많은 글을 올렸는데, 본격적으로 저에 대해 소개한 적이 없더라고요! 처음 <MessaZe가 도착했습니다> 시리즈를 기획할 때부터, 제 이야기도 함께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껏 만난 모든 인터뷰이에게서 질문을 하나씩 받았습니다. 우리 서로 입장을 바꾼다면, 저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은지요. 오늘은 작가를 넘어 인간 송혜교로서의 이야기를 자세히 공개합니다.
Q. 처음 글을 쓰신 건 언제인가요? 작가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마 여섯 살쯤이었을 거예요. 어린이 시절에는 주로 시를 썼어요. 집필량도 꽤 많아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이미 수첩 한 권을 꽉 채울 정도였죠. 초등학교 1학년 국어 시간에 <나뭇잎들>이라는 시를 제출한 적 있어요. 계절의 흐름에 따라 피고 지는 나뭇잎의 생애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그 시를 정말 좋아하셨어요. 운이 좋게도 굉장히 어린 나이에, 누군가 내 글을 좋아해 주는 기쁨을 알게 된 거죠. 선생님이 칭찬을 듬뿍 해 주시고, 교실 뒤편 잘 보이는 자리에 전시해 주셨던 기억이 나요.
부모님은 제가 독특한 아이라고 생각하셨대요. 다른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을 때, 몇 주에 걸쳐서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고 해요. 이렇게 적고 보니 무슨 그럴듯한 설화 같지만, 참말입니다…. 어릴 적부터 정확한 단어를 쓰고 싶다는 열망이 유달리 강했어요. 4학년 때 학교에서 조별로 삼행시를 지어오는 숙제를 받았는데요. 그때 친구들에게 열변을 토하던 기억이 나요. "아니야, '스스로' 할 수 없는 것과 '혼자서' 할 수 없는 건 완전히 다른 거야!" 친구들은 얘가 왜 이러나 싶었을 거예요. 이 자리를 빌려 풍성초등학교 친구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
청소년기에는 주로 소설을 썼어요. 혼자 비밀스럽게 쓰다가 공모전에 출품했는데, 덜컥 금상을 탔어요. 상금도 50만 원이나 됐죠. 그런데 시상식 참석이 필수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쓴 글이라는 걸 온 세상에 밝혀야 한다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수상을 거부했어요. 제가 생각했을 때는 그렇게 자랑스러운 작품이 아니었거든요.
돌아보니 아쉬운 일이에요. 덥석 받아야 했어요. 글 써서 50만 원 버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그때는 몰랐어요. 비록 약력에 남기지는 못했지만,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굉장히 뿌듯했어요. 계속 써 봐도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였죠.
Q. 중학교 자퇴는 쉽지 않은 선택이잖아요.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요? 또 홈스쿨링은 어떻게 진행하셨나요?
살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안 된다는 말이나, 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어릴 적부터 중요한 선택을 직접 내리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교육을 받았거든요. 자퇴도 마찬가지였죠. 학교에 서류를 내기 전에 몇 차례 가족회의를 하면서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부모님의 조언을 기반으로 제가 자퇴를 택한 거죠.
중학교 과정부터 홈스쿨링을 했다고 하면, 부모님이 교과를 가르치셨으리라 예상하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저희 아버지가 수학 선생님이시거든요. 그러니 더더욱 그렇게들 생각하시죠. 그런데 사실 저는 혼자 공부했어요. 제가 자퇴했을 때, 아버지께서 "네가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해서, 아빠가 퇴근 후 집에 와서도 일해야 하는 건 아니야"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저도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교재를 쌓아놓고 10번씩 읽었어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생기면 그때는 EBS 무료 강의를 봤고요. 교육비를 많이 아낀 거죠. 물론 그렇게 아낀 교육비는 전부 호의호식하는 데 썼고요. 자퇴 직후 온 가족이 양평으로 이사했고, 덕분에 정말 행복하게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었어요.
당시 집에 작고 낡은 오토바이가 하나 있었어요. 아빠와 둘이서 그 오토바이를 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양평 곳곳을 돌아다녔어요. 중미산 꼭대기에 있는 포장마차에 가서 감자전을 먹는다든지, 집 뒷산에 올라가 산딸기를 딴다든지. 제 인생의 호시절을 하나 꼽으라면 그때를 택할 거예요.
Q. 어쩌다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오랜 세월 비영리활동을 할 수 있었던 비결도 궁금해요.
거창한 뜻을 품고 비영리활동에 뛰어든 건 아니에요. 제가 학교 밖 청소년으로 살면서 부조리한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친구들과 함께 모여 행사를 열었고, 이후에는 아예 단체를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청소년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죠.
제가 지금 만으로 스물여섯인데, 그중 11년을 비영리활동가로 지냈어요. 이제는 누군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제 삶의 일부가 된 거죠. 만약 비영리활동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았더라면, 쉽게 엄두를 못 냈을 거예요. 어릴 때 뭣도 모르고 시작한 게 다행이에요.
사실 종교가 있어서 이런 활동을 하게 된 것이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요. 저는 무교예요. 다만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모든 어른이 지닌 의무라고 믿는 사람이죠. 더 좋은 세상을 향해 싸워온 어른들 덕분에 저도 행복하게 자랐으니까요. 저에게 교육과 정책이란 제 의무를 다하는 방법 중 하나예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칼럼 속 구절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어요.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
Q. 에세이, 소설, 칼럼, 작사까지 아주 다양한 작업을 하시잖아요. 그중에서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하나를 고르려니 쉽지 않네요. 저는 특정 장르보다는 '글쓰기' 그 자체를 좋아하거든요. 낯선 주제에도 거침없이 뛰어드는 편이고, 독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매체도 가리지 않아요. 책으로 내거나, 신문사에 기고하거나, 브런치스토리에 연재하죠.
처음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할 때 이렇게 결심했어요. 가장 뛰어난 작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가장 다채로운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요. 에세이도, 소설도, 칼럼도 잘 쓰고 싶어요. 욕심이 좀 과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죠. 그만큼 과하게 노력할 수밖에요.
저는 정말 치열하게 써요. '열심히 썼다'라는 말 앞에 부끄러운 적 없어요. 어느 시점부터는 무엇이든 써야만 하는 사람이 됐고요. 글쓰기가 목적이자 삶의 동력 그 자체가 된 거죠. 앞으로도 글로 할 수 있는 작업은 다 해 보고 싶어요. 한때 글 쓰는 직무로 취업을 해 본 적도 있고, 지난해에는 작사가 오디션에 합격해서 소속사도 생겼어요. 포토샵을 잘 다룬다거나, 코딩을 잘하는 것처럼 글을 똑바로 쓸 줄 아는 것이 저의 무기라고 생각해요. 계속 날카롭게 갈고닦을 거예요.
Q. MBTI가 무엇인지, 슬럼프나 불안함에 어떻게 대처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직업 탓인지, 보통 제가 감성적인 성향일 거라고 추측하시더라고요. 사실 제 MBTI는 ENTJ고, 한 번도 바뀐 적 없어요. 글을 쓸 때도 감정보다는 이성을 따르려고 노력해요. 비영리활동을 하게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요. 만약 안쓰러워하는 마음,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더라면 금방 그만두었을 거예요.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고, 제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기에 지속할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슬럼프나 불안함 앞에 의연한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 한 번 멈춰 서면 다시 출발하기까지 정말 오래 걸리는 편이죠. 그래서 느리게라도 계속 굴러가려고 노력해요.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정말 힘든 일이 찾아오더라도요.
아무리 바빠도 매일 영단어를 40~50개 정도 외워요. 하루에 3분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요. 술을 진탕 마셨다거나, 당장 쓰러질 것처럼 피곤한 날에도 반드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고 자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게 제 일상을 지지하는 루틴이에요.
제 삶이 늘 저의 최선이었으면 해요. 촘촘히 준비하면 설렘이 긴장감을 압도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앞으로도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려고요. 아무도 제 슬럼프를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겠거든요. 저 자신조차도요!
Q. <20대지만 깡시골에 삽니다>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로서, 도시와 시골을 오가는 일과가 궁금해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양평에서 자랐고, 요즘에는 다시 서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어느 지역에 머무나 제 일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 느지막이 일어나서 씻고 바로 책상 앞에 앉아요. 종일 무언가를 읽거나 쓰면서 보내요. 잠들기 직전이 되어서야 노트북을 끄고요.
양평에 있을 때는 창문을 자주 열어놔요. 가을이 오면 나무 아래 해먹에 누워 책을 읽고요. 새소리, 빗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듣고 있으면 이런 시간을 보내려고 태어났나 싶을 정도로 좋거든요. 똑같이 종일 글을 쓰더라도 양평에서는 훨씬 여유로운 느낌이 들죠.
반면 서울에서는 저도 모르게 치열해지는 듯해요.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잖아요. 그에 발맞춰 저도 무언가를 더 해내야 할 것 같아요. 젊은 날의 커리어나 생활의 편리함을 생각한다면 서울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예요. 서울에서는 문화생활을 훨씬 자주 하거든요. 서점이나 도서관에 훌쩍 다녀오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요.
다만 마음 한편으로는 늘 양평을 그리워해요. 화려한 야경보다는 달밤의 귀뚜라미 소리가 좋아요. 아무래도 저는 자연과 동떨어질 수 없는 사람인가 봐요. 편리함보다는 편안함이 저와 잘 맞아요.
Q. 최근 가장 큰 행복을 느꼈을 때가 언제인가요?
가장 최근의 행복을 고르기는 어렵네요. 저는 행복이 기본값인 사람이거든요. 지독한 집순이라서, 집에 머물 때는 주로 항상 평온하고 행복한 상태예요. 며칠 내내 집안에만 있어도 지루하지 않아요. 특히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지대한 관심이 있는데, 좋은 가구나 조명, 책, 음악을 가까이하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한 번 좋아하는 게 생기면 질리지 않아요. 매일 똑같은 일상에서도 소소하게 짜릿함을 느낀달까요. 오늘 아침에도 몇 년 전에 산 소파에 앉으면서 "아, 정말 좋다"라며 감탄했어요. 계속 감흥이 있으니 자주 행복해요.
그래도 가장 순도 높은 행복을 고르라면, 올초에 서호주에서 보내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늘은 손에 잡힐 것처럼 낮고, 물속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손 틈새로 물살이들이 지나가는 게 좋았어요. 10년 만에 다시 간 여행이라 추억에 못 미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우려였죠. 호주에서 마주한 모든 풍경이 아름다웠어요. 지구인이라서 참 좋더라고요.
Q. 작가로서, 또 송혜교라는 한 인간으로서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사실 올해 작가로서 큰 목표를 하나 이뤘어요. 브런치스토리에 소설 <사뿐히 가라앉는 마음>을 연재할 당시 한 독자님이 저에게 긴 메일을 보내주셨거든요. 자신의 이야기와 똑 닮아서 놀랐고, 큰 위안을 받았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는 늘 읽는 이의 삶에 닿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런 메시지가 정말 큰 원동력이 됐죠.
앞으로도 꾸준히, 탄탄하게 활자로 된 세계를 짓고 싶어요. 그 세계에 즐거운 마음으로 놀러 오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글쓰기 실력에 정체가 없어야겠죠. 좀 더 구체적인 목표는 글쓰기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거예요. 사실 그렇게까지 큰돈은 필요 없거든요. 가장 중요한 건 글 쓰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일이죠.
로또에 당첨되더라도 양평 한갓진 곳에 집을 짓고 살 거예요. 좀 더 맛있는 걸 자주 먹고, 좀 더 여행을 자주 가겠지만, 근본적으로 제 삶은 지금과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누군가가 저에게 출처가 명확한 세후 20억을 준다면 이 사실을 곧바로 입증해 보일 텐데, 현실성이 부족한 답변을 드리게 되어 아쉽네요. <20대에 20억이 생겼습니다> 시리즈로 돌아올 수 있기를 응원해 주세요.
Q. 다양한 젊은이들의 삶에 대해 들어보셨는데요. 본인의 이야기를 쓰는 것과,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즐거웠나요?
처음에는 생각이 아주 확고했어요. 아무리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한들, 저만의 글을 쓰는 기쁨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 거라고 여겼죠. 그런데 연재를 거듭할수록 마음이 기울더라고요. 지난 4개월 동안은 혼자 쓰던 원고도 내팽개치고, 인터뷰어의 역할에 푹 빠져 지냈어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잖아요. <MessaZe가 도착했습니다>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제 마음이 꼭 그랬어요. 매주 새로운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지금 이 인터뷰가 이 시리즈의 마지막 화인데요. 연재하면서 상상 이상으로 즐거웠고, 또 감사하게도 좋은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시즌 2도 고민하고 있어요.
Q. 인터뷰 전후로 MZ라는 단어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나요? 더불어 이 사회에서 'MZ하다'는 표현이 어떻게 파생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세대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MZ세대'라는 용어 자체가 폭 넓은 사람들을 하나의 점에 묶어두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MessaZe가 도착했습니다>는 이러한 생각에서 촉발한 시리즈예요. 모든 인터뷰이에게 '스스로 MZ하다고 생각하냐'라는 질문을 던진 이유죠.
91년생부터 08년생에 이르는 젊은 세대를 인터뷰했는데, 흥미롭게도 돌아오는 답변이 거의 비슷했어요. 물론 자신에게도 'MZ한' 면이 있으나, 동시에 그와 정반대의 성향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실제로 이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다방면으로 자료 조사를 했는데요.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건 1991년에 발행된 한 기사였어요.
이제 겨우 1인당 국민소득이 5천달러를 넘어선 시점에서 「亡國病」과도 같은 근로의욕의 감퇴로 인해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이들이 힘든 일을 외면하고 유흥업소에 나가 쉽게 돈을 벌려는 풍조때문에 요즘 제조업체들은 근로자를 구하지 못해 심각한 求人難을 겪고 있다.
- 김기서, <제조업 경쟁력>, 연합뉴스, 1991.03.14
'요즘 애들'에 대한 우려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고 생각해요. MZ라는 용어도 그저 하나의 유행이 되었을 뿐이고요. 지금 저는 디지털 원주민 세대로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머지않아 AI 원주민들과 마주하며 갈등을 겪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너는 너, 나는 나'라고 구분 짓고 싶지는 않아요. 세대나 소속을 모두 지우고, 개인에 대해 알아가고 싶어요.
Q. 한국의 20대 여성으로서, 현시대의 가치관과 문화가 본인과 잘 맞는다고 느끼시나요?
한국 사회에서는 소속과 나이가 아주 중요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중학교를 자퇴한 이후로 철저히 비주류의 삶을 산 셈이에요. 사실 그리 용감하거나 무모한 행동을 해 본 적이 없는데요. 이상하게도 용감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듣게 되더라고요. 아마 한국에서는 저와 같은 삶의 형태가 드물기 때문일 거예요. 저는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가 그리는 지도를 따라가지 않는 편이거든요.
우리 사회에는 아직 다양성이 부족해요. 언뜻 완전해 보이지만, 사실은 곳곳에 차별이 숨어있고요. 하지만 완벽한 사회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이 나라가 좋아요. 특히 작가로서 한국어가 제 모국어라는 게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가끔은 이 세상이 정말 미워질 때도 있지만, 그런 문제들을 모른 척하고 싶지는 않아요. 더 좋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손 놓고 기다리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서 나름의 방식으로 틀을 깨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회단체 활동을 하는 것도, 이 인터뷰 시리즈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고요. 소소하게는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 나이에 연연하지 않기' 운동을 혼자서 실천하고 있어요.
Q. 10년 전의 나와 10년 후의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면?
저는 지난날을 돌아보지 않는 편인데요. 나쁜 일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도 잘 잊어요. 이력서를 쓸 때가 되어서야 '아 맞다, 나 장관상을 세 개나 받았지!' 하며 과거를 떠올리곤 해요. 그래서인지 과거의 제가 타인 같아요. 전생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10년 전의 저에게는 딱히 전하고 싶은 말이 없어요. 그냥 고마운 존재죠. 이미 처절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제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거예요.
제가 청소년기에 쓴 버킷리스트가 있거든요. 주로 여행에 관한 것들이에요. 로마에서 젤라토 먹기, 뉴욕에서 비긴어게인 OST 듣기, 상해 임시정부 가서 독립선언서 읽기, 스무 살 생일 파리에서 보내기 등등. 물론 책 쓰기나 연애에 대한 것도 있고요.
최근에 그 리스트를 다시 봤는데, 놀랍게도 지난 10년 동안 다 이뤘더라고요. 단 하나도 빠짐없이요. 정말로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산 거예요. 개중에는 예상도 못 한 시점에,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이룬 꿈들도 있어요.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는 게 인생의 멋진 점이라고 생각해요. 10년 후의 저도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동안 멈추지 않았는지, 꿈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는지 묻고 싶어요. 혹시 모르죠, 지금의 제가 상상도 못 할 만큼 멋지게 살고 있을지!
Q.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지금, 앞날이 막막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이겠죠? 가끔은 작가의 꿈, 차기작 투고, 그런 것들은 다 접어두고 다시 일자리를 구한 뒤 주택 청약 통장에 10만 원을 꼬박꼬박 넣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혀요. 보장이 더 잘 되는 실비보험으로 갈아타서, 보험사의 눈치 보는 일 없이 도수 치료도 받고 싶고요. 주 7일 일을 하는데도 나라에서 근로장려금을 주는 이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요.
하지만 누가 뭐래도 저는 지금의 삶에 정말 만족해요. 그리고 그건 전부 여러분 덕분이에요. 누군가 제 글을 읽어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이 공간에서 많이 배웠거든요. 이제는 혼자 쓰고 혼자 읽던 시절이 아득하게 느껴져요.
지난 2년 반 동안 브런치에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올렸죠. 면허를 따고, 운동에 입문하고, 여행을 떠나는 제 삶의 중요한 지점에 항상 여러분이 있었어요. 모니터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다가도, 다정한 댓글을 보며 웃음 지었던 것이 여러 번이에요. 간혹 답글이 늦어지긴 하지만, 저는 모든 댓글을 다 읽고 있답니다. 언제나 과분한 사랑과 칭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계속 글을 쓸 거예요. 점점 더 잘 쓸 거예요. 30대가 되고, 40대가 되면 반드시 지금보다 좋은 작가가 되어있을 거예요.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여러분은 일종의 저점매수를 하시는 셈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제 인생의 목격자가 되어주세요. 그럼, 건강히 지내세요!
Edited by 송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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