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부터 시작하는 자영업, 95년생의 일과 삶
Q.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단, 소속 없이 자신을 설명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7년 차 자영업자, 95년생 앤지입니다. 원래는 이민을 준비했었어요. 학부생 시절 친구의 추천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가 호주의 매력에 푹 빠졌거든요. 그런데 당시 호주 이민의 벽이 좀 높았던 터라, 뉴질랜드로 노선을 틀었죠.
그런데 인생이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더라고요. 뉴질랜드에 머물던 중,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서 카페를 창업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냐고 부탁하셨어요. 처음에는 1년 정도만 도와드리고 뉴질랜드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터를 잡고 사장이 되었네요. 지금은 세 개의 브런치 카페를 운영하고 있어요.
Q.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셨는데, 힘들게 들어간 대학을 돌연 자퇴하셨다고요?
네, 중학생 때까지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덕분에 꽤 유명한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에 진학했고요.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좌절감을 느꼈어요. 이전까지는 공부하는 것 자체를 즐길 줄 알았는데, 정말 탁월한 사람들 사이에 놓이니 점점 스트레스가 커지더라고요. 특히 수능이 다가올수록 너무 두려웠죠.
그런데 이게 웬걸, 막상 입시를 마치고 나니 수능 이후의 삶이 또 있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의 저에게는 정말 큰 충격이었어요. 12년 내내 수능만 보고 달려왔는데, 수능 이후의 삶이 있다니! 마치 항상 앞에 놓인 거대한 산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는데, 그 산을 넘고 나니 너무나도 드넓은 평원이 있는 기분이었어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는 거죠.
저는 학부에서 동물생명공학을 전공했어요. 1학년을 마쳤을 때, 호주에 사는 친구가 와서 지내볼 것을 권하더라고요. 제 성향과도 잘 맞을 것 같다면서요. 곧바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로 향했죠. 그리고 그때 깨달았어요. 아, 좋은 대학 나와서 대기업에 들어가는 그런 정해진 삶만이 정답은 아니구나. 삶에는 참 다양한 길이 있구나! 그렇게 대학 이외의 삶이 있다는 걸 깨닫고 대학을 그만두게 된 거죠.
지금 제 막냇동생이 고3인데요. 제가 매일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는, 공부하면서 얻는 경험 그 자체에 있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공부하지 말고 공부의 본질을 파악해라. 제가 열심히 공부해 본 후 내린 결론은 바로 이거였어요.
Q. 이민까지 결심했다니, 호주와 뉴질랜드의 매력이 엄청났나 봐요.
세계가 확장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다르다고 느꼈죠. 제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부분 '학사나 석사를 마치고 취업하겠다'라는 식으로 뚜렷한 삶의 계획을 가진 경우가 많았거든요. 물론 대학에 진학하고, 회사에 다니는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지만, 저의 경우 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증이 컸어요. 어쩌면 한국에 살면서,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에 지쳐있었던 건지도 몰라요.
호주에서 삶을 마음대로 꾸미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어요. 보장되지 않은 모험을 하는 삶이 정말 멋있어 보였죠. 특히 여유란 단순히 금전적인 것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어요. 호주에는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문화가 아주 뿌리 깊거든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경험을 호주에서 처음 겪게 됐어요. 칭찬할 점을 찾아내는 게 호주인들의 특징 같아요. 하다못해 "네 신발 예쁘다!"라는 사소한 칭찬조차 호주에서는 정말 흔해요. 그런 문화 덕분에 평가가 아닌 칭찬에 비교적 익숙해졌죠.
Q. 지구 반대편에서의 삶을 꿈꾸던 청년이 어쩌다 한국의 카페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요?
사실 카페나 창업에 대한 뜻이 전혀 없었어요. 처음 부모님이 도움을 요청하셨을 때도 3개월 동안 고사했을 정도로요. 뉴질랜드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중이었고, 이대로라면 무리 없이 영주권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무엇보다도 자영업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인지 잘 아니까요. 사실 한국을 떠나기 전 6년 동안 여러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일하면서 '와, 자영업은 정말 힘들구나. 나는 못 하겠다….' 생각한 게 여러 번인데 어느새 그 일을 7년째 하고 있네요.
아버지께서 목공을 굉장히 좋아하세요. 그래서 목공 카페를 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계셨는데, 어머니께서 반대하셨어요. 커피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카페를 여는 게 무리라고 생각하신 거죠. 정 창업해야 한다면, 카페에서 일한 경험이 많은 딸의 도움을 받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 저를 설득하신 거예요.
딱 1년만 도와줄 것, 돈을 많이 벌어가서 편안하게 이민을 준비할 것. 이게 초반의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브런치 카페라는 게 50~60대가 잘 해내기 힘든 비즈니스더라고요. 트렌드도 너무 빠르게 바뀌고, 체력적으로도 버겁고요. 하면 할수록 이걸 부모님께 맡기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연스럽게 제가 맡게 되었어요.
Q. 카페 사장,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보는 직업 같아요. 하지만 스물다섯에 자영업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카페 창업은 로망을 가지고 뛰어들어도 환상이 와장창 깨질 만큼 힘든 일이에요. 처음에는 '내가 도대체 왜 이 일을 한다고 했을까, 그때 더 단호하게 거절했어야 하는데…. ' 하면서 후회를 많이 했어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정말 고되거든요.
스물다섯에 카페 사장이 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모든 영역에서 경험이 부족한 만큼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세금 문제를 잘 몰라서 번 돈을 고스란히 세금으로 다 낸 적도 있었고요. 손님을 응대하는 것, 직원들과 협력하는 것…. 뭐 하나 쉬운 게 없더라고요. 특히 첫 3년 동안은 자리를 잡아야 하니 하루에 12시간, 주 7일 일했어요.
저는 키가 156cm로 작은 편이고, 순한 인상이에요. 그래서 사장으로서 힘든 점이 많았어요. 무언가 거래하거나 견적을 받을 때 덤터기를 씌우려 한다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 사람들 눈에는 제가 '애 같고 만만해 보이는 20대 여자 사장'이었던 거죠. 하지만 저는 외유내강이거든요. 보기보다 강하고 단단해요. 제가 해낼 수 있다는 걸 믿었기 때문에 힘든 시간도 버틸 수 있었어요.
카페를 열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뉴질랜드에 남았더라면 제 인생은 조금 더 재미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쩌면,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먼 타국에서 바라만 보는 것이 훨씬 불행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답니다.
Q. 주 7일, 매일 12시간 근무. 아무리 사장이라고 해도 소화하기 힘든 스케줄인데요. 버거운 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버텨내셨는지 궁금해요.
가장 힘들었던 건 매일 생기는 변수예요. 한 번은 손님이 명품 신발을 신고 오셨는데, 가게 구석에 아주 작게 튀어나와 있던 못에 올이 풀려 곤란했던 적도 있고요. 손님이 가게 앞에서 넘어지셔서 병원비를 대신 낸다거나, 태풍에 지붕 조각이 날아가 손님 차를 때려 보상해 드린 일도 있었어요.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생각했죠. '이렇게 많은 일이 20대에 벌어지다니. 그런데 다 이겨내다니! 내 30대는 얼마나 멋질까?'라고요. 특히 카페를 운영한 지 2년이 넘어가면서부터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피하지 못할 거라면 즐기기로 결심한 거죠.
저는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서울 외곽에 있는 대형 카페이다 보니 지역적인 특수성이 있어요. 멀리 나들이를 온 고객이 많은 만큼, 단순히 맛뿐만 아니라 인테리어와 트렌드까지 깊이 고려해야 하죠.
손님이 없어 한가한 날이면 페인트칠이라도 하고, 매일 인테리어 정비, 마당 정리, 매장 직원 교육, 세무회계 관리에 힘썼어요. 쉬는 날에는 다른 카페를 돌며 시장조사를 했고요. 이런 노력 덕분에 저희 카페가 포털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남양주 카페 4위에 오르는 성과를 냈어요. 아직도 그날이 기억에 남아요. '와, 내가 정말 해냈구나!' 하며 기뻐하던 순간이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이 있더라도 리더로서 잘 끌어나가는 것, 손님의 컴플레인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 각종 서류와 세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 하나하나 직접 배우고 닦아온 길이에요. 카페가 성장하는 만큼 저도 덩달아 성장한 셈이죠.
Q. 가족과 함께 사업하는 것도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벌써 카페를 3개나 운영하고 계신다고요?
제가 1호점을 성황리에 영업하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두부전골 집을 열기로 결심하셨어요. 가게를 얻고 직접 인테리어를 하셨죠. 사실 아버지는 사진작가였어요. 목공을 취미로 가진 전형적인 예술가고요. 그 덕분에 창고를 멋진 카페로 개조하고, 카페에 들어가는 가구도 다 직접 만드실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게 몸에 배서인지 이번에도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두부전골 집이 탄생해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를 설득했어요. 지금 이 카페가 잘 되고 있으니, 2호점을 내시는 게 어떻겠냐고요. 그 인테리어에는 두부전골 집보다는 브런치 카페가 훨씬 어울릴 것 같았거든요. 또 한식은 객단가가 낮고 아르바이트 직원을 구하기도 어려워요. 60대인 아버지가 하루 종일 혼자 씨름하시는 것보다는, 카페를 확장하며 함께 운영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했어요.
3호점은 의외로 제 결정이었어요. 창업 3년 정도 되었을 때, 건물주가 바뀌면서 소송을 시작했거든요.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만 수백만 원을 썼죠. 그때 이미 저희 가게는 매일 웨이팅이 있을 정도로 잘 되고 있었는데, 외부적 요인 때문에 한순간에 가게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틈틈이 찾아보다가, 허름한 창고형 카페가 매물로 나온 걸 발견했어요. 1호점과 멀지 않은 위치에다 주차장도 괜찮고, 창고인 만큼 일반적인 상가에는 담기 힘든 저희만의 분위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이전의 개념으로 3호점을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1호점은 폐업하고, 바로 옆에 네 번째 매장을 오픈해 1호점이 4호점이 되었어요. 2, 3, 4호점 세 개를 운영하고 있는 셈이에요.
Q. 자영업자로서 코로나를 정면으로 지나쳐 오셨어요.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자영업이라는 게 참 쉽지 않죠.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았어요. 개업 초기에 코로나가 터졌는데, 이전에도 딱히 유명하지는 않았던 터라 타격이랄 것도 없었거든요. 오히려 아주 깊은 골목에 있는 대형 카페라는 점 덕분에 이득을 봤어요. 코로나가 한창일 시기에는 작고 아기자기한 동네 카페보다 사람들과 떨어져 앉을 수 있는 널찍한 카페를 찾으시는 분이 많았잖아요.
한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게 불가능하던 시기가 있었는데요. 정책상 음식점에서 파는 커피는 마실 수 있었어요. 저희 매장은 기본적으로 브런치 카페라 식당으로 분류되었고, 그래서 커피 판매도 가능했죠. 그래서 더더욱 손님이 몰리는 현상도 있었어요. 아이유 씨가 출연하는 CF 촬영 장소로 섭외되는 행운도 누렸죠.
Q. 쉴 틈 없이 바쁜 젊은 사장님, 요즘 무슨 재미로 사나요?
저는 일상 속 기쁨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에요. 날씨가 좋아도 행복하고, 맛있는 걸 먹어도 행복하고, 장사가 잘되면 잘 돼서, 안 되면 날 잡고 청소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행복은 양이 아니라 빈도라고 믿어요.
우스운 얘기일 수도 있지만, 저는 정신 승리야말로 진정한 승리라고 생각해요. 이전에 정말 지저분한 소송에 얽혀서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도 어떻게든 정신 승리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경찰 조사관님이 친절하셔서, 소송을 위해 가족이 더 똘똘 뭉치게 되어서, 부모님이 건강하셔서 참 좋다고요.
그리고 딱 한 달 전에 결혼했는데, 남편이랑 평생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해요. 제가 워낙 바쁘다 보니 남편이 집안일을 대부분 맡아서 해 주거든요. 가끔 여유가 생기면 일찍 일어나서 제가 먼저 집안일을 해요. 그런 날에는 남편이 편하게 쉴 걸 생각하면 또 행복해지더라고요.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희한하리만치 싸우지 않았어요. 좋은 사람을 만나 건강한 관계를 이어간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다시 한번 체감하는 나날입니다.
Q. 보통 'MZ하다'라고 표현하는 특성들이 있잖아요. 스스로 MZ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제가 꼰대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침없이 목소리를 내고, 트렌디한 것이 MZ의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다 저와는 거리가 있는 특성들이에요. 굳이 따지자면 트렌디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늘 트렌드를 공부하는 사람이랄까요.
그래도 저희 직원들은 저를 MZ한 사장님이라고 불러줘요. 아주 고마운 일이죠. 제가 아르바이트를 워낙 많이 해 왔다 보니 제가 대우받고 싶었던 대로 직원들을 대우하려 노력하는데, 그런 진심은 결국 닿는 것 같아요. 지금도 직원들이 원하는 게 뭘까 자주 고민해요. 급여도 처음에는 보통의 카페들처럼 최저시급으로 시작하지만, 이후 역량에 따라 차등 지급하고요.
저는 일을 하며 직원들과 수다 떠는 걸 정말 좋아하는데요. 취미가 무엇인지, 앞으로의 꿈이 무엇인지 종종 물어봐요. 취미를 알면 선물을 줄 때 도움이 되고, 꿈을 알면 적절한 업무를 줄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마케팅에 관심이 있는 직원이 있으면, 배우고 싶은 분야의 학원비를 지원해 준 후 관련 업무를 맡겨요. 추후 자기 사업을 꿈꾸는 직원에게는 매니저 업무를 조금씩 나눠주면서 전반적인 매장 운영을 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요. 셰프를 꿈꾸는 직원에게는 메뉴 개발을 맡기죠.
이렇게 말하면 제가 착한 사장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 그건 아니고요. 그냥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해요. 받은 만큼 노력하는 게 인간 본연의 심리잖아요. 구성원의 성장이야말로 브랜드 성장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이라고 생각하고요. 무엇보다도 사람을 부품처럼 여기고 싶지 않아요.
Q.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가 있다면요?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한창 과로하던 시기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일만 하다가 내 삶이 아예 없어지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자기 계발을 늘 놓지 않으려 해요. 사실 자영업이라는 게 참 불안정하잖아요. 당장 장사가 잘되더라도, 언제 물가가 폭등하고 경기가 안 좋아질지는 모르는 일이죠.
불확실성에 기대 만족하기보다는, 언젠가 다른 일에 도전하더라도 잘 해낼 수 있도록 다양한 역량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6년 동안 매주 한 시간씩 중국어 공부를 해 왔어요. 특히 중국에 오래 살았던 남편을 만난 후로는 집에서도 공부하고 있고요. 지하철을 탈 때면 꼭 책을 읽으려 노력해요. 사업가 모임에 나가 인사이트를 얻고, 운동도 틈틈이 하고요.
<유퀴즈 온 더 블럭>을 보다가, 유재석 씨가 삶의 목표를 세우는 대신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고 이야기하시는 걸 들었어요. 제 가치관도 그와 비슷해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고 싶어요.
Q.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는 게 정말 막막할 때, '어제보다 딱 한 개만 잘해보자'라는 생각을 떠올리셨으면 좋겠어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고 하잖아요. 구태여 큰 뜻을 두지 않아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돌아봤을 때 참 많은 것이 쌓여있더라고요.
누군가가 저에게 "그래서 지금 네 삶은 성공적이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거예요. 어떤 사람은 저보다 학벌이 좋거나, 사업적으로 더 성공했거나, 돈이 많겠죠. 하지만 저에게 더 이상의 최선은 없어요. 제게 주어진 삶에서 최고의 나날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힘든 날은 불쑥 찾아오겠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그리고 저도 조금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dited by 송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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