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말고, 공무원 말고, '진짜' 원하는 걸 찾기 위한 95년생의 모험
Q.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단, 소속 없이 자신을 설명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강사로 일하는 95년생 박지원입니다. 원래는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임용 시험을 본 후 유치원 교사로 살았는데요. 문득 그 직업이 저와 맞지 않는다고 느껴 과감하게 퇴사했습니다. 이후 제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위해, 교사로 생활하며 모은 돈을 전부 들고 배낭여행을 떠났어요.
1년 동안 세계 일주를 했고, 여행을 마친 후 프랑스에 잠시 머물다, 지금은 다시 한국에 정착했어요. 현재 노량진에서 유치원 교사 임용시험 대비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유아교육 전공으로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기도 해요.
Q. 유치원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학창 시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꿈꾸기도 했고요. 틀에 박힌 입시 시스템이나 정규 교육과정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다만 어머니와 담임 선생님이 몇 달간 만류하셔서 그냥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저는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아이였어요. 순수 미술 작가를 꿈꾸기도 했고, 글도 쓰고 싶었죠. 돌고래를 좋아하니 제주도에 가서 돌고래 조련사가 되어볼까? 아니면 연극 극작가나 배우가 되어볼까? 그래서 실제로 아무도 몰래 연기과 시험을 본 적도 있어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언니가 교대에 진학했어요. 그 무렵 가족들이 모두 입을 모아 "교사가 되면 네가 하고 싶은 예술을 취미로 즐기면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어"라며 저를 설득했죠. 당시에는 꿈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제법 말을 잘 듣는 청소년이었던지라 그 말을 따랐어요. 교사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니, 단순히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유치원 교사를 선택한 거죠.
Q. 그렇게 선택한 전공이 생각과는 조금 달랐나요?
유아교육과에 진학한 후 꽤 오래 방황했어요. 학사 경고까지 받을 정도로요. 애초에 유치원 교사라는 직업을 한 번도 꿈꿔본 적 없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요. 제가 무엇에 소질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죠.
그런데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유독 과외에서 성과가 나더라고요. 학부모님들도, 학생들도 제 수업을 정말 좋아했어요. 덕분에 학부에 다니면서 웬만한 직장인 월급만큼 과외비를 벌 수 있었죠. 그때 어렴풋이 느꼈어요. 교육이 나와 맞는 길이구나.
다만 성과가 좋았을 뿐, 여전히 재미는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피해 다녔죠. 4학년이 될 때까지 뭘 해서 먹고살지 계속 고민했어요. 그냥 임용시험을 볼까, 아니면 외항사 승무원이 되어볼까. 이것도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데, 실제로 승무원 원서를 넣어본 적도 있어요. 탈락의 맛을 봤지만요. 마지막까지 고민을 거듭하다 교생 실습을 나갔는데, 아이들이 정말 예쁘더라고요. 순전히 아이들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유치원 교사가 되는 길을 완주할 수 있었던 거예요.
Q. 그리고 20대 후반이 되어, 다시 한번 진로 고민에 빠지셨다고요?
임용시험에 합격해 교사가 되었는데 정말 하나도 행복하지 않더라고요. 처음에는 중요한 목표를 하나 이뤘으니, 이다음에는 어떤 목표를 세워볼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다들 이제 결혼 자금을 모으고, 조건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고 조언하더라고요. 혹은 승진을 준비해야 한다거나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 나는 어릴 적부터 끝없이 밀려있는 숙제를 해내면서 살아왔구나. 정작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연필을 쥔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누군가 내준 숙제만 계속해서 풀고 있구나. 이제는 시간표에 맞춰 살아야 하는 고등학생도 아닌데, 자유로운 성인이면서도 스스로를 계속 정해진 틀에 가둬놓았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소속이 어떻고…. 그런 모든 시선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로 했어요. 태어나 처음으로 '내 마음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거예요. 그렇게 돌아보니, 단지 안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버티면서 사는 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이 났어요.
Q. 교사는 안정적이고 존경받는 직업이잖아요, 그만둘 때 주변의 반대도 있었을 것 같아요.
당시 저는 28살이었는데, 주변 어른들이 엄청나게 말리셨어요. 이제 결혼은 어떻게 할 거냐, 여자 직업으로 이만한 건 없다, 그 나이에 사회에 나가면 이제 좋은 직업도 못 찾는다면서요. 신기하게도 그런 만류를 들으니 선택이 한층 쉬워지더라고요.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20년 후 만난 젊은이들에게 그런 말을 반복하는 어른이 될까 두려웠어요. 그 길로 바로 퇴사하게 되었죠.
당시에는 유치원 교사가 힘든 직업이라서 그만두게 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니더라고요. 그게 어떤 직업이었든 쉬어가야 할 시기였던 것 같아요.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처음부터 찾아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필요했으니까요.
Q. 어쩌다 퇴사 후 돌연 세계여행을 떠나게 되었나요?
퇴사하면서,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리스트를 쓰기 시작했어요. 시간이나 돈, 책임, 이루어야 할 것, 주변의 시선을 전부 배제하고 내 마음이 끌리는 것이 무엇인지요. 그때 리스트에 쓴 것들이 터키에서 무화과 먹기, 발리 우붓에서 자전거 타기 , 아프리카 가서 기린 보기, 인도에서 카레 먹기 등이었어요.
한창 자퇴를 꿈꾸던 고등학생 시절, 도서관에 숨어서 세계여행, 배낭여행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어요. 나도 이렇게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고 싶다, 생각하면서요. 낯선 곳에서 오직 나만 믿고, 내 목소리만 듣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그동안 모은 돈을 전부 들고, 편도 티켓만 끊고 발리로 갔어요. 발리가 너무 좋아서 두 달간 머물렀죠. 그다음에는 인도, 탄자니아, 케냐, 이집트, 터키, 불가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 여러 나라를 여행했어요.
Q. 혼자 배낭을 메고 세계를 돌아본다는 것, 정말 낭만적이에요. 그 여행이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나요?
지금껏 알던 세상이 부서지는 것 같은 경험을 했어요. 예를 들면, 탄자니아 여행을 할 때였어요. 배낭여행자인지라 돈을 아끼려면 마을버스를 타며 이동해야 했는데, 막상 가 보니 버스 정류장이 없더라고요. 사실 버스 노선도 없고, 시간 배정표도 없었던 거예요. 무슨 이웃집 토토로 고양이 버스도 아니고, 어디에서 몇 시에 탈 수 있을지 모르는 버스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거죠.
어이없어하는 저를 보며, 호스텔 직원이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디스 이즈 아프리카!" 네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게 많을 거다, 받아들여라. 그 말을 듣는데 머리가 띵했어요. 우리는 습관처럼 '상식적으로'라는 말을 쓰잖아요. 하지만 상식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른 거죠. 그런 당연한 사실을 새삼 되새기게 됐어요.
덴마크에 머물 때는, 한창 퀴어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어요. 우리나라에는 퀴어 페스티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많잖아요. 관련 기사에 악플도 많이 달리고요. 그런데 덴마크는 온 나라의 축제인 것처럼 국기 옆에 무지개 깃발을 꽂아두고, 지하철역이나 상점들까지 무지개로 빼곡히 채우더라고요.
프랑스에 있는 유명한 서점에 갔을 때는, 페미니즘/퀴어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는 걸 봤어요. 혐오 발언을 하면 이상한 취급을 받는 것이 이 사회의 분위기라는 걸 깨달았죠. 그렇게 다양한 세계를 만날 때마다 숨통이 트이고 짜릿했어요. 저는 한국 사회에서 좋다고 정해둔 것들을 정답이라 생각하고 따라가기에 바빴는데, 그동안 얼마나 좁은 편견에 갇혀있었나 싶더라고요.
길 위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 "Why not? 너 하고 싶은 대로 해."였어요. 다소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겪어보니 정말 정답이랄 게 없더라고요.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직접 가 봐야만 하죠. 여행 중 길을 잃었는데, 덕분에 더 좋은 곳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배낭여행이 인생과 닮아있다고 느꼈어요. 한 해 동안 지구를 도는 배낭여행이 제 가치관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다시 쌓아 올리는 과정이 된 셈이죠.
Q. 여행하다 보면, 문득 이곳에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이 한 번쯤은 들잖아요. 어떤 나라에 마음을 빼앗겼나요?
제일 좋았던 곳은 발리였어요. 특히 저는 우붓을 정말 사랑해서 쭉 눌러살고 싶었죠. 그런데 발리 음식이 제 몸과는 너무 안 맞았던 건지, 급성 맹장염에 걸려버렸어요.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맹장 수술을 받으면서 '자칫하단 죽을 수도 있겠네!' 싶더라고요. 그렇게 발리 살이는 무산됐어요.
두 번째로 떠오르는 건 탄자니아예요. 잔지바르섬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고, 빌딩 하나 없는 킬리만자로의 대자연도 숨 막힐 정도였죠. 특히 그 지역에서는 아보카도가 1개에 500원 정도로 정말 저렴한데, 엄청나게 맛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의료 수준이나 사회 인프라 등 현실적인 부분까지 전부 따졌을 때는 프랑스가 가장 좋았어요. 그래서 배낭여행을 마친 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다시 프랑스로 떠났어요. 저는 늘 해외 유학이나 이민에 미련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거주하겠다고 마음먹어보니, 저는 이민이 아니라 여행과 맞는 사람이더라고요. 어딜 가나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이 저를 따라다니는데, '여기에서 나는 이방인이며 앞으로도 쭉 그렇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가족이나 한국 음식이 그리웠고요.
그래서 1년짜리 비자를 받은 것이 무색하게도 6주만 지내다가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때 해외 생활에 대한 미련이 싹 사라졌죠. 프랑스가 안 좋아서라기보단, 한국이 저와 가장 잘 맞는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어요. 내 나라에서 내 언어를 쓰며 살아간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라는 것도 그때 배웠고요.
Q. 타지에서 생활하면서 '먹고사는 일'을 재정의하셨다고요?
발리에 머물며 수많은 디지털노마드를 만났어요. 그무렵 저도 그때 소속 없이, 나만의 기술이나 브랜드로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을 10개 정도 알아보고 도전했죠. 그중에서 전자책과 유튜브에서 소소한 수익이 났는데, 제게는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주 5일,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하며 돈을 버는 것. 그게 원래 제가 알던 직업의 세계였는데요. 답답한 조직 생활을 하지 않아도, 주 5일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온라인 콘텐츠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새로운 세상에 처음으로 눈을 뜬 거예요. 그때의 경험이 현재의 직업으로 이어졌죠.
지금은 노량진에서 유아 임용에 대해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어요. 제가 여행 중 썼던 전자책이 유아 임용 공부법과 관련된 내용이었거든요. 자신 있는 주제로 글을 써 봤을 뿐인데 생각보다 잘 팔렸고, 이를 계기로 노량진 학원가에서 러브콜이 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시험 삼아 혼자 웹사이트를 열고 온라인 강의를 시작했는데, 학생 6명이 최종 합격을 했어요. 그때 '아, 이 길이 내 길이 맞구나!'하는 확신이 들었죠.
Q. 자유로이 생활하다 다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까지,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일 년 넘게 지구를 돌아보니, 자유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어요. 배부른 소리 같지만, 마지막으로 파리에서 시간을 보낼 때는 그 모든 자유와 평화에 권태를 느꼈죠. 매일 잔디밭에 누워 크루상 먹고, 책 읽고, 강변을 거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지루해지는 때가 오더라고요.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고 있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정말 힘든 거더라고요.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 당장 일을 시작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때 깨달았죠. 약간의 스트레스 후에 맛보는 자유야말로 정말 달콤한 거라는 걸요.
다만 이 직업을 갖기 전 한 가지 고민했던 게 있다면, '내가 교사로서 행복하지 못했는데, 누군가에게 교사가 되라며 가르칠 자격이 있나'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더 깊이 알아보니, 유아교육에도 교사 교육, 교재·교구 개발, 연구 등 다양한 분야가 있더라고요. 저는 단지 현장 교사라는 직업과 맞지 않았을 뿐이었고요. 유아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현장 교사만 떠올린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죠.
저는 조직에 들어가기보다는 자율적으로 일하며,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계약 후 본격적으로 온라인 강의를 시작했어요. 절대적인 업무량은 교사 시절보다 많지만, 자율적으로 일한다는 게 정말 좋아요. 열심히 하는 만큼 보상도 따라오고, 합격하며 기뻐할 수험생들을 생각하면 벅차오르기도 해요.
특히 "어릴 적부터 이게 꿈이었어요. 아이들이랑 있는 게 정말 좋아요."라는 예비 교사의 말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유치원 교사라는 길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꿈이구나,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구나. 그런 뿌듯함을 느꼈죠.
저는 갑자기 수중에 백억이 생긴대도 지금처럼 지내고 싶어요. 그 정도로 현재의 삶이 만족스러워요. 강의를 시작하며, 이전에 쌓은 모든 경험이 다 제 자산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학부생 때는 이 길이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은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강의도, 교재 집필도 더 잘하고 싶어서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죠.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게 참 재미있어요.
Q. 노량진 인강 강사의 하루, 어떤 모습인가요?
보통 아침 9시쯤 일어나서 운동을 갑니다. 필라테스와 헬스에 재미를 붙였거든요. 필라테스는 몸의 균형이 맞춰지는 느낌이 좋아서, 헬스는 하고 나면 개운해서 좋아요. 오전 중으로 강아지랑 산책하고, 엄마와 함께 브런치를 먹어요. 건강한 식단에도 관심이 많아서, 요즘에는 올리브오일에 레몬즙을 타서 꼭 한 잔 챙겨 마시고요.
일주일에 한 번은 수강생들 앞에 서서 강의해요. 이때 동시에 촬영도 진행하죠. 하루에 적게는 4강, 많게는 8강 정도를 찍어요. 강의가 없는 날에는 주로 교재 편집과 강의 준비를 합니다. 오후 1시쯤 일을 시작해서 자정 전까지는 마치려고 해요. 따로 휴일을 정해두는 대신, 작업량을 제 뜻대로 조절하며 쉬어요. 바쁜 일상이지만, 강의하는 날을 제외하면 출퇴근하지 않아도 되니 만족도가 아주 높아요!
Q. 보통 'MZ하다'라고 표현하는 특성들이 있잖아요. 스스로 MZ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불합리한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MZ한 것 같아요. 저는 불필요한 규율이나 수직적인 관계를 정말 질색하고요. 원래 그런 거니까 계속 그대로 하라는 말에 반대하는 편이에요. 계속 그렇게 하려면,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죠.
결정적으로, 사람들이 서로를 더 존중했으면 좋겠어요. 삶의 모습을 통일하려 들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도록 좀 가만히 두자는 거죠. 추구하는 가치는 모두 다른 거니까요. 10년 전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이상하리만치 불안해하던 제 모습이 떠올라요. 모두가 맞다고 하는 길 위에 올랐는데도 계속 방황했죠.
돌이켜 보니 모든 게 필요한 과정이었더라고요. 그 후로 제 삶에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재밌는 일이 많이 일어났고요. 그러니 사람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제가 또 어떤 것에 도전하게 될지,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Q.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제가 마주한 환상적인 순간을 공유하고 싶어요. 탄자니아에 '키짐카지'라는 야생 돌고래 서식지가 있어요. 저는 돌고래를 정말 좋아해서 꼭 만나고 싶었는데, 말 그대로 야생동물이다 보니 늘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저도 한 번 실패하고, 두 번째로 도전하기 위해 아침 일찍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던 기억이 나요.
스노클링 장비를 착용하고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행운이 따랐는지 야생 돌고래 떼를 마주했어요. 자기들끼리 엄청난 초음파 소리를 내며 제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돌고래들이 짝을 지어 장난스럽게 수영하는 모습도 봤어요.
그 넓은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돌고래들을 바라보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해요.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고일 정도예요. 이 지구에서 나는 아주 작은 미물이구나, 그러니 조금 더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되겠다. 그런 용기를 얻었죠. 그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광경을 독자분들께도 보내드리고 싶어요.
Edited by 송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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