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3대 영양소라는 알코올, 니코틴, 카페인 중독을 넘어, 갓생 중독을 주의해야 하는 세상이 왔다. 온 세상이 내 눈앞에서 <갓생 살자!>라고 적힌 종이를 흔들어대며 "밥벌이 이외에도 어학 공부나 건설적인 취미 생활을 해야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착각이 아니라 현실이다. 실제로 온 세상이 갓생으로 뒤덮여있다.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 #갓생, #갓생살기를 검색해 보면, 25만 건에 육박하는 게시물이 올라와 있다. 유튜브에 '갓생 브이로그'를 검색하면 직장인부터 초등학생까지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0년생의 17시간 공부하는 브이로그♬' 같은 제목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킥킥, 아줌마 잘 놀지.'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든다. 갓생 열풍,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 갓생, 제 거 맞나요?
'갓생 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신조어인 만큼 그 정확한 시작점을 찾아내기는 다소 힘들겠지만, 네이버 데이터랩의 통계에 따르면 갓생이 처음 검색된 것은 2020년 4월이며, 이후로 꾸준히 검색량이 증가했다. 코로나 19가 확산되면서 처음으로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갓생 열풍은 코로나와 함께 쑥쑥 자랐다'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2020년 경기도교육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많은 학생이 코로나19 이후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친구들은 어느 정도 실력인지 구분할 수 없다’, ‘성적이 떨어질까 봐 불안하다’ 등의 의견을 냈다고 한다. 비록 현실 세계에서는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온라인 세상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지낸 지난 몇 년이다. 그 초연결사회가 더 많은 비교와 우울을 낳았다.
사실 오프라인 세상에서는 비교 대상이 한정적이다. 학창 시절에는 주로 같은 학교나 학원의 친구가 거의 전부고, 성인이 된 후에도 동료나 가까운 지인 등 나와 직접 대볼 수 있는 대상이 그리 폭넓지는 않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로 SNS 등 디지털 세상에 오래 머물게 되면서, 비교할 대상도 비교할 시간도 늘어났다. 이제는 정형화된 '갓생 챌린지'에 동참하는 것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인지, 2020년대의 새로운 과시 거리인지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갓생과 혐생만 있는 건 아니야
한편, 갓생과 반대되는 신조어로 '혐생'도 등장했다. 혐오스러운 인생. 뭐 하나 잘난 것 없는 자신의 삶을 비관할 때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칭할 때 사용한다. 갓생과 마찬가지로 꽤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단어라, 자신의 삶을 혐생으로 칭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꼭 삶에서 어떤 실패를 겪어야만 쓰는 말이 아니다. 당장 출근하기 싫지만 회사에 가야 하는 끔찍한 현실도 쉽게 혐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삶을 갓생과 혐생으로 이분화할 수는 없다. 삶에는 갓-, 개-, 킹- 같은 요즘의 접두사로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작은 기쁨이 숨어있으니까. 언제나 갓생을 사는 사람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갓생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가끔은 자신에게 화가 나고 실망스럽고 바꿀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혐오가 모든 슬픔을 대변할 수 없다는 걸. 미적지근한 생도 있고 울적한 생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을 혐생이라고 부르는 건 그리 옳지 않은 방향이다. 갓생과 혐생 사이 그 어딘가에 수억 가지의 생이 있다.
갓생은 얼어 죽을 갓생!
시리즈의 제목을 '아주 최소한의 갓생'으로 지은 이유는, 갓생에 깐깐한 조건을 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사람만 갓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으름은 삶을 고단케 하는 악독한 친구 같은 존재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으른 자신의 생을 곧 혐생으로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걸 더 많은 사람이 알아줬으면 했다. 성취의 크기는 타인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갓생의 방향을 한 곳으로 정해놓아서는 안 된다는 걸.
1화에서 나는 나 자신을 '게으른 애 중에 제일 부지런한 애'라고 칭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이렇게 정의하는 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휘몰아치는 갓생 열풍을 보면서 나는 절대 '부지런한 사람' 축에는 들 수 없겠구나, 이번 생은 죽을 때까지 이불 정리를 귀찮아하다가 끝나겠구나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부지런해야 사람인가, 나는 그냥 안 아프고 게으르게 살고 싶다. 그냥 조금 피곤할 수도 있고 조금 느리게 갈 수도 있는 거니까.
갓생, 갓생, 얼어 죽을 갓생의 울타리는 다 집어던지자. 내 안의 게으름과 적당히 타협하고 어제보다 조금 더 발전하는 방법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최소한의 갓생'은 달성한 셈이다. 앞서 말했듯 ‘갓생’이란, 내 삶의 키를 원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돌려놓는 삶이니까. 내가 내 삶을 갓생이라 부르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 노력의 끝에 진정으로 나의 게으름마저 사랑하게 된다면, 그게 바로 최고의 갓생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