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후, 진짜. 도대체 그 아줌마는 왜 그래에?”
나의 울분 섞인 물음에 돌아오는 말이라곤
“언니, 여자들이 원래 좀 그으래. 그냥 넘기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고”
원래... 원래? 원래 그렇다니.
사랑싸움할 때 ‘난 원래 그래, 네가 이해해.’도 아니고. 원래, 본디, 오리지날리(Originally), 내추럴리(Naturally) 그렇다니.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다음 스텝이라곤, 그저 고개 끄덕이며 ‘그렇구나...’ 하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뿐인데. ‘원래’라는 단어처럼 전후 사정 뚝 끊어버리고, 아무런 맥락도 없이, 상대에 대한 순수한 인간적, 인문학적, 사회학적(^^) 이해에의 욕구를 좌절시켜버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아줌마-여자들이 무리 지어 다니며 누군가를 왕따 하고, 뒷담 화하고, 질투하고, 집착하는 게 원래 그렇다니, 나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도 같은 아줌마 여자로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은 여자가 여자 스스로를 ‘B급 인격체’라 인정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는 못하겠다.
가상의 인물, 왕마초와 나소심이 있다. 왕마초는 학생 때부터 공부도 나름 잘하고, 주체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며 살아왔다. 그런 왕마초를 부모님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 왕마초는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입사한다. 어느덧, 왕마초의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 왕마초는 어느 정도의 미모와 학력, 그리고 인성을 갖춘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 그런 왕마초가 배우자 선택 조건 중, 가장 1순위로 꼽은 것은 ‘착한 여자’. 나와 나의 부모님에게 잘해 줄 착한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 대학 때부터 눈여겨본 나소심이 맘에 든다. 나소심은, 선배들과 동기들을 잘 챙긴다. 나소심은 왕마초의 의견에 반박을 거의 하지 않는다. 왕마초는 나소심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결혼 후, 왕마초는 나소심의 하나하나를 세심히 챙겨준다. 나소심의 인터넷 쇼핑 시 옷 색깔과 스타일도 골라주고, 나소심이 좋아할 만한 가방도 인터넷 최저가를 검색해서 사다 준다. 주방세제의 등급도 설명해준다. 1종, 2종, 3종을 구분 짓는 기준과 특성에 대해서. 우리 가정에는 1종 주방세제가 적합하니, 이제부터 1종을 사라고 권고해준다. 언제인가부터 나소심은 물건을 사기 전에 미리 왕마초에게 카톡으로 사진을 보낸다. 그리고 왕마초가 허락하면 구매를 결정한다. 나소심 마음대로 구매했다가는, 그날은 하루 종일 왕마초의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어느 날, 나소심의 아이가 열이 40도까지 올랐다. 병원에 가야 하는데 거리가 꽤나 멀다. 나소심은 운전을 못 한다. 출근한 남편에게 연락해서 어서 집으로 와 달라고 한다. 나소심은 스스로 택시를 부르거나, 119 구급차를 부를 생각조 차을 하지 못 한다.
1950년대 이야기냐고? 아니다. 지금 2019년 현재 이야기다. (물론 픽션이다.) 이렇게까지 부인이 남편에게 의존하는 경우는 아주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삶의 많은 부분에서 남편의 동의와 허락, 그 애매한 경계에서 헤매며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지 못하거나, 혹은 자신의 의견을 고민조차도 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아줌마들이 꽤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나소심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그녀는 참 착. 하. 다.’였다. 그녀는 착하기에 모임에서‘저는 다 좋아요’를 자주 말했다. 언제 만날지,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더라도 그녀는 다 좋아했다. 실제로 그 어떤 불만도 없는 듯했다. 나는 ‘착하다’는 말이, 도덕적 윤리적 사회 규범을 지키는 것 -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를 바람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하며, 하나하나 꼬집어 묻고,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이 명확하며, 부탁을 잘 거절해도 - 그는 착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착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마음속. 그 사람의 내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착한 여자’ 나소심은 모임에 나올 때마다 거의 매번 남편 뒷담화를 했다. 그녀도 하나하나 왕마초에게 맞추면서 사는 것이 꽤나 힘든 거다. 그래, 충분히 이해한다. 토닥토닥. 그런데 나의 이해의 토닥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나소심은 왕마초의 ‘위대함’을 곧잘 자랑했다. 나소심의 삶을 주도해서 끌고 가는 남자가 강하고 멋져야, 이끌려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도 인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삶의 대부분을 남편의 취향과 선호에 맞춰오면서 나소심은 아마도 남편과의 일체감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내 안에서는 일어나는 자기 소멸에의 불안감을 느끼는 순간에는, 이 삶이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남편 뒷담화로 그것을 해소한다. 해소되면, 또 남편에게 맞춘다. 나소심은 그렇게 느낀 남편과의 일체감으로 남편이 사회적으로 쌓아가고 있는 성공에의 성과마저도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욕하지만 만족하는’ 삶이 이런 것인가. 인생은 아이러니다.
나는 그녀가 매우 ‘착하게’ 키워졌으리라 예상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잘하고 또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에의 시간이 그녀에게 주어졌을까.
책 ‘여자의 인간관계’ 저자 미즈시바 히로코는 이렇게 말한다.
뒤틀린 여자가 주변 상황에 따라 혹은 개인의 경험과 성장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된다면 단순히 생물학적 성을 원인으로 볼 수는 없다. 여자니까 그렇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편 여성이 사회에서 어떻게 양육되고, 어떠한 ‘여성다움’이 요구되는가를 보면, 뒤틀린 여자의 특성이 당연한 결과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즉, 뒤틀린 여자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그에 부응하기 위해 여성들이 노력한 결과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 여자의 인간관계. 미즈시바 히로코 p.21
이 책에서 말하는 뒤틀린 여자란, 질투하고 편 가르고 서로 뒷담화하는 여자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여자들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키워진 것이 더 적합하다. ‘여자의 인간관계’ 책에서는 한 시대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남자로부터 선택받는 성이었다고 설명한다.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관문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선택받기 위해서, 자신의 개별적 특성을 지우고, 선택 주체인 남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택되어지지 않고 남게 된 여자들은 그 실망감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상대방을 험담하여 낮춤으로써, 자신의 당위를 지켜왔다고 말한다. 여자의 뒷담화 또한, 선택받아야만 하는 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대학 졸업 시에, 대학원으로 진학을 해야 할지 취업을 해야 할지 고민했었다. 사실은 대학원 진학이 더 하고 싶었었다. 공부 자체에 흥미를 느끼기도 했었고, 좀 더 좋은 대학 타이틀을 따고 싶은 개인적 욕망이 있었었다. 나의 아버지는 한 마디로 나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여자가 무슨 대학원이냐, 너 석사 따면 시집 못가’ 나는 진학 대신 취업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시집을 가기 위해서, 남자들의 선택에서 배제되는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접은 겪이다. 20여 년 전의 이야기다. 그런데, 진짜 20여 년 전의 이야기일까. 우리는 아직도 지속적으로 여자 아이들을 ‘남자는 능력, 여자는 매력’이라며, 여자들의 원래 그런 특성들이 묵시적으로 유전되도록 키우고 있지는 않는가.
여자의 ‘원래’ 그런 특성을 그 여자 개인의 인격적 결함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시선을 좀 더 큰 범주로 돌려, 사회적 맥락으로 이해해 보고자 했다. 여자들의 이런 뒤틀린 특성이 여자들에게 요구된 사회적 기대의 부산물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나로서는, 훨씬 납득이 간다.
하여, 나는 아줌마들에 대한 개인적 판단을 유보하기로 결심했다. 가끔씩 쉽게 막 판단해 버리려는 내 마음에 제동을 거는 것이 나 또한 쉽지 않지만, 가능하면 내 잣대로 그녀들을 이리저리 제단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우리는 모두, 가끔은 매우 척박하게까지 느껴지는 삶의 여러 순간들을 견뎌내며 이곳 이 아파트에서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로써 만났다. 오늘 이곳에 오기까지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들 또한, 살면서 맞닥드렸던 많은 선택지들 가운데 최선의 것이라 여겨지는 것을 신중하게 선택했을 것이다. 또한 어떤 것들은 포기하면서, 그것을 기꺼이 책임지며 살고 있다. 겪어내야 하는 것들을 겪으면서 뚜.벅.뚜.벅. 왔을 것이다. 뒷담화나 일삼는 가벼운 아줌마. 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이유가 있겠지. 왕따를 조장하는 이유, 뒷담화를 하는 이유, 또 나를 싫어하는 이유.
도대체가 왜 저러는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그 행동을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내 힘으로 아무리 바꾸어 보려고 노력해도 절대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에 제일 시달리는 사람은 나, 본인이다. 반복적으로 겪을 때마다 내가 제일 고민하고 내가 제일 괴롭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감당해보려고 내가 제일 애쓴다. 나도 그렇다. 내가 이러한 것처럼, 다들 본인이 감당해내기 힘든 삶의 ‘어떤’ 부분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아프다. 그 아픔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녀들 또한 나처럼 뚜벅뚜벅 살아가는 아줌마라는 인정. 그것에 기인한 판단 유보. 그렇게 나의 관계에의 거리두기는 마무리되었다. 뭐가 이렇게 냉랭한지 모르겠다. 그냥 뒤죽박죽 섞여서 막 울고 웃고 또 괴로워하고, 막 욕하고, 막 편 가르기 했다가 또 막 다시 사귀고 그렇게 막막 그렇게, 마구마구 그렇게 하고 싶지만, 이제는 머리가 너무 굵어져서 그렇게 할 용기가 안 나는 것이 더 솔직한가.
여자의 인간관계 저자, 미즈시마 히코코가 말하기를,
"늘 공정하게 사람을 대하고 정직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여성, 마음이 따뜻하고 뒤끝이 없으며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여성은 모든 여자들이 좋아한다. 그녀는 상처 입은 뒤틀린 여자를 안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코 자신을 배신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 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 여자의 인간관계. 미즈시바 히로코 p.41"
몰라서 안 하는 거 아닙니다. 못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