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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현철 Sep 21. 2023

대지진과 리스본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들, 회복탄력성의 비결을 배우다.

리스본의 석양 - 포르타스 두솔 전망대

포르투갈은 사랑스러운 도시다. 특히 리스본이 그랬다. 대륙의 끝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항해시대의 주인공. 대서양으로 떨어지는 석양은 우리의 것과 분명 같은 것일진대, 더 짙고 아름다웠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고 언덕에 지어진 도시지만 가는 곳곳 매력이 넘치고 어느 곳에서 카메라를 켜도 작품이 되는 곳. 그곳이 바로 리스본이다.


최근에 한국인의 방문이 크게 늘었지만, 사실 유럽에서는 매우 사랑받는 관광지 가운데 하나이다. 주요 관광명소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오히려 동양인이 귀하다. 스페인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매일 백 수십 명의 한국인이 유럽의 각 도시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도대체 다들 어디에 간 것일까?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LISBOA

리스본은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다. 과거 BC800~600년 사이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들의 무역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직후인 BC205년, 로마에 복속되기도 했는데, 이후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스페인도 마찬가지로 이베리아 반도 전체가 이슬람인 무어인의 지배를 받았다. 이를 물리치기 위해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이 통일이 되기도 했단다 - 자세한 이야기는 전전 편 참고) 12세기 중반에 다시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이후 15~16세기 리스본의 황금기가 찾아온다. 아시아와 중남미, 브라질을 식민지로 가졌던 포르투갈은 향신료와 노예, 설탕, 직물 등을 유럽 각국에 중개하며 최고의 시대를 보내게 된다.


대지진과 도시의 파괴

그런데 이러한 리스본의 번영은 한순간에 사라졌는데, 바로 1755년 11월 1일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이 그것이다. 당시 진도 9의 대지진과 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해일과 화재로 도시의 85% 이상이 파괴되고 인구의 약 15%가 사망했다고 한다. 도시의 85%가 파괴되었다고 하면 상상이나 될까? 서울이, 부산이, 대구가, 광주가 85% 파괴되었다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리스본 대지진을 묘사한 그림

리스본 대지진이 먼저 찾아오고, 대지진으로 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게 되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안가로 피신했는데, 안타깝게도 지진의 여파로 다가온 지진 해일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또 한 번 아픔을 전해 주었다. 지진 해일에도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도시로 올라왔는데 지진 때문에 생긴 화재가 이후 5일이나 이어지면서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이야 리스본이 멋지게 재건되었지만 지금도 이야기를 전하는 포르투갈 친구의 표정에는 진지함과 엄숙함이 가득하다.

<1755년 지진의 알레고리>

당시 지진의 피해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그림을 통해 간접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림에는 지진이 신의 재앙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공중 천사들의 손에 불칼이 쥐어져 있다. 포르투갈 왕이었던 주제 1세는 다행히 교외에 있어 화를 면했지만 이후 리스본 교외의 임시 궁에서 평생을 살았고, 폐쇄공포증에 걸려 평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딸이었던 마리아 1세는 아버지인 주제 1세가 죽은 뒤에야 궁을 다시 짓고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리스본의 재건

마누엘 다 마이아에 의해 도시 재건이 시작되었는데, 주제 1세는 재건에 대한 전권은 그에게 위임했다고 하고 훗날 가장 잘 한 선택가운데 하나라고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마누엘 다 마이아는 리스본의 재건을 위해 5가지 계획안을 발표했는데 첫 번째, 리스본의 폐자지를 재활용하여 그 자리에 그대로 다시 도시를 짓는 것,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길과 거리를 넓히고 공공시설을 다시 짓는 것, 네 번째는 구시가지를 완전히 철거하고 백지 위에 새 도시를 짓는 것, 마지막 다섯 번째는 리스본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었다. 왕가의 선택은 네 번째로 리스본을 철거하고 새 도시를 짓는 것으로 확정되었고 지금의 바둑판식 현대도시가 완성되었다.


가장 편하고 비용이 적었던 그 자재 그대로 재건이나 차라리 아예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힘도 노력도 비용도 적게 들었을 텐데, 이들은 보다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가장 힘든, 완전한 철거와 새로운 건축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곰곰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나의 사적인 견해로 볼 때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힘을 아끼는 것도, 최소한의 노력과 비용도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와 전통을 이어간다는 이들의 삶의 철학이지 않았을까? 이후 폼발 후작은 “죽은 자를 묻고 산 자를 치유하자”는 모토로 시민들을 일깨우고 재건을 완성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의 “Keep calm and carry on”이 떠올랐다.

호시우 광장

기억하는 리스본 사람들

리스본의 재건은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리스본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다. 때로는 너무 큰 아픔은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리스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도시 곳곳에 대지진의 흔적을 남기고 이를 통해 다음을 대비하도록 한 것이다. 내가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이것이다. 가장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한 리스본 사람들과 그리고 고통과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기며 품어내는 리스본 사람들. 독일에 방문했을 때도 우리가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임을 스스로 잊이 않으려는 노력과 피해국과 그들을 위해 사죄의 마음을 담은 표시를 거리 곳곳에 해 둔 것에 강한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리스본 또한 도시의 번영을 한 순간에 날려 보내고 가장 아픈 피해를 준 대지진이지만, 이를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리스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호시우 광정의 이 물결무늬 타일도 대지진과 지진해일을 의미하며 이것을 보며 리스본 사람들은 대지진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리고 도시 곳곳에 지진의 흔적들을 남겨 놓았다. 이유는 앞에 설명한 것과 같다. 나는 여기서 포르투갈 사람들의 회복탄력성을 보았다. 그 회복탄력성의 기초는 기억하는 힘이다. 우리도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아픔을 기억해서 무엇하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기억은 사회를 단련시키는 힘이 된다. 리스본의 재건을 보라. 우리 사회도 아픔을 기억하는 성숙함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코메르시우 광장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리스본을 바라본다.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라, 그리고 이 도시에 있음이 신기하다. 여길 지나는 사람들은 내가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에서 왔음을 알고 있을까? 살면서 다시 리스본에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꼭 한 번은 와야 할 곳에 잘 왔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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