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시절 수십 번을 반복하며 읽었던 만화책이 있어요. 너무나 유명한 ‘천계영’ 작가님의 ‘오디션’이라는 작품입니다. 네 명의 밴드 멤버들이 주인공이고, 귀여운 조력자들, 미워할 수 없는 라이벌들도 여럿 나오죠. 그중 저의 최애 캐릭터는 ‘황보래용’입니다. 극 중 캐릭터들의 이름은 모두 특이해요. ‘국철, 장달봉, 류미끼, 박부옥, 정명자, 변득출, 왕오삼 등등’ 그중 황보래용은 가장 도회적이면서도 미스터리 한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황보래용은 천재 소년으로 등장합니다. 수학경시대회 1등이면서, 아주 말간 소년 같은 면모를 가졌고,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비범하고 당찬 얼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황보래용을 보면서 안경을 착용하고 싶다는 유치한 생각을 했었어요. 극 중 캐릭터의 모습을 설명해 보자면, 날렵한 턱선과 눈매, 오렌지색 머리와 마른 몸, 신문지로 접은 모자를 머리 위에 얹어 쓰고는 뛰어오는 모습, 그리고 두껍고 뾰족한 뿔테안경은 묘한 부조화를 이룹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황보래용의 입체적이고 특이한 캐릭터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어린 시절 눈이 꽤나 좋았던 저는 안경을 쓸 필요도 이유도 없었어요. 요즘에야 도수가 없는 ‘멋’을 위한 안경이라던가, 블루라이트를 차단하는 용도의 안경을 착용하는 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에만 해도 눈이 나쁘지 않은데 안경을 쓰는 건 꽤나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일부러 TV나 책을 가까이에서 보기도 하고, 내 눈은 언제쯤 나빠지려나? 하며 안경을 쓰는 날만을 고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철없던 10대 시절이 지나 이제 30대가 되어버린 저는 드디어 안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직업병이거나 노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꽤나 설레기도 했어요. 어느 날부턴가 오른쪽 눈만 뿌옇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한쪽씩 손으로 눈을 가리고 세상을 보면, 분명 오른쪽의 세상만 흐리멍덩했습니다. 검안을 해보니 저는 부등시가 되었더군요.
안경테를 고르는 일은 꽤나 신중해야만 했습니다. 매일 써도 질리지 않았으면 했고 얼굴형과도 잘 어울렸으면 했거든요. 무난한 아넬형의 안경테를 집어 들어 써보았는데, 잘 어울렸지만 너무 착해 보여서 다시 내려두었습니다. 10분을 넘게 이것저것 써보다 운명처럼 집어 들게 되는 안경을 찾았어요. 알이 큰 안경을 좋아하지 않던 저는 최대한 작고 네모난 안경을 쓰고 싶었거든요. 짙은 밤색과 투명한 호박색이 뒤섞인 네모나고 작은 안경을 찾았습니다. 거울을 보고 나서야 알았어요. ‘아, 그렇게나 동경했던 황보래용 같은 안경구나’ 하고요. 그렇게 서둘러 결제를 하고 렌즈를 가공하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안경이 만들어지는 30분 동안 속으로 비실비실거리며 웃었어요. ‘황보래용이라니, 이것도 운명인 건가?’ 하고요. 완성된 안경을 건네주는 검안사님에게 괜한 씰룩임을 들킬까 애써 침착하게 행동하려 애썼어요. 그렇게 기대하던 안경을 쓰고 밖으로 나온 순간 정말 놀라웠습니다. 완벽한 안경을 찾았다는 기쁨 때문인지, 오랜 시간 나도 모르게 방치했던 시력이 교정되어서 인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이 너무 선명했거든요. 선명하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었어요. 운전을 할 때 사이드 미러를 보면 이런 문구가 적혀있잖아요.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딱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가까이 보이고 선명하다고?' 하면서 온갖 멀리 떨어진 간판의 글씨와 전화번호를 소리 내서 읽어보기도 했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며, 전광판에 깜빡이는 버스 번호를 읽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경건한 마음으로 거울 앞에 앉아 얼굴을 뜯어보고 있자니 기침처럼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20년을 바라왔던 모습이 거울 속에서 곁눈질로 웃어 보이고 있었습니다. 문신처럼 얼굴에 새기고 싶은 심정이었달까요
안경을 쓰는 일은 거추장스럽습니다. 렌즈에 먼지라도 묻으면 눈앞이 뽀얗기도 하고요, 고개를 숙이면 안경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합니다. 아직 익숙지 않은 제게는, 간지러운 눈을 비비려다가 안경알을 비비기도 하고, 가끔 운전을 하다 눈을 돌리면 안경테가 시야를 조금 가리기도 해요. 그럼에도 안경은 훌륭합니다. 지적인 예술가, 시를 쓰는 작가, 글을 읽기 좋아하는 독서광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요즘 '긱시크'룩의 완성은 안경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그 기원은 '황보래용'입니다. 나의 첫 아이돌.
여러분이 닮고 싶은 모습을 완성시켜 줄 소품을 찾아보세요. 어쩌면 아주 작은 것으로도 스스로가 멋져 보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