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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치한 May 20. 2024

[프롤로그] 유치한 사람


20대 중반,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후였을 거예요. 어느 날 한 선배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취향이 좀 유치한데 귀엽긴 하네?' 하고요. 선배는 어떤 의도로 저에게 그런 말을 했던 건지 아직도 그 의중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이야 '무슨 뜻이에요?'하고 되물어 볼 수 있겠지만, 처세술이랄 게 없던 어린 저는 알 수 없는 찝찝함만을 가진 채 '아, 허허 네...' 하고 말았죠. 아마 당시에 제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해요. 회사 책상 위를 좋아하는 인형들로 채우길 좋아했어요. 디자인팀은 꽤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을 했기에 가능했는데요, 저는 수십 년을 미키마우스에 빠져 살았습니다. 특히 빈티지 미키마우스 인형에 애정이 깊어 모으기를 좋아했죠.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 붙어있는 게 회사 책상이라, 모니터 옆에도 창가에도 미키마우스 인형들을 하나 둘 올려두며 감상하길 즐겼어요. 선배는 꽤나 '쿨'한 모양새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선배를 하루는 동경하고 하루는 질투하기도 했었죠. 저런 취향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그런 선배가 저를 조금 비웃는 것 같다 느껴지니 알 수 없는 자격지심이라는 게 마음속에서 튀어나오더라고요. 화장실에서 손을 벅벅 씻으며 '자기가 뭐 얼마나 세련된 인간이라고 나를 비웃어?' 하며 휴지를 구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20대가 지나 30대가 된 저는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커다란 상자 안에는 그간 모아둔 미키마우스 인형이 곱게 잠들어 있습니다. 몇몇은 함께 사는 강아지에게 선물해주기도 했고, 가장 큰 덤보인형은 강아지의 쿠션이 되기도 했습니다.


유치한 게 나쁜 걸까요? '유치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어요.


유치하다

형용사  

1. 나이가 어리다.      

2. 수준이 낮거나 미숙하다.      


라고 나옵니다.


부정적인 뉘앙스가 그득한 게 사실이지만, 저는 유치함을 찬양해보려고 합니다. 꼭 모두가 언제나 어른스러울 필요는 없잖아요. 회사에서는 멋진 옷을 입고 미팅을 하다가도 집에 와선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만화책을 보기도 해요. 무표정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걷고 있지만, 귓속에 들려오는 건 그 시절 싸이월드 음악들입니다. 곰돌이 젤리 껍질을 까면서 '나 초록색 곰돌이 좋아하는데! 많이 들어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양쪽 갈림길에서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강아지와 투닥거리기도 하고요. 


생각해 보니, 선배 말처럼 유치하다는 건 달리 이야기하면 귀엽다는 뜻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여전히 유치한 생각, 유치한 취향, 유치한 물건들을 좋아해요. 서른넷의 나를 열여덟 살의 마음으로 바꿔놓는다거나, 여든 살이 된 할아버지로 변신시키기도 하니까요. 누군가 뒤에서 흉볼까 봐, 그동안 혼자서만 품어오던 유치한 이야기들을 고백해 보려고요.




언젠가 핀터레스트에서 찾아 저장해 둔 사진입니다.

내가 이렇게 계속 자라면 귀여운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저의 이상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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