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한복판 건물 숲에 살았거나, 남평 같은 조그마한 시골에 살았거나, 가족의 식탁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손녀는 8 학군이라 불리는 서울의 한 동네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매일 먹는다는 김영모 베이커리의 샌드위치나 모스 버거를 먹어 본 건 손에 꼽는 대신, 다섯 가지 정도 되는 김치가 식탁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현란한 할머니표 집밥을 매일 같이 먹었다.
꼬순내 나는 802호 시골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구수함은 싹 잊어버리고, '세련된 여고생이자'라는 주문을 걸었다. 분주한 학생들, 출근하는 어른들 틈에 손녀도 새침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를 지나 명품 책가방을 든 또래 학생들 사이로 등교를 했다. 하굣길엔 그 동네에 한국 1호점을 내고, 상시 도넛 굴러가는 기계가 보이는 크리스피 도넛에 친구들과 몰려가곤 했었다. 머리가 깨질 듯 달달하고 따땃한 도넛을 하나 베어 물던 손녀와는 달리, 엄마 심부름이라며 몇 박스씩 도넛을 주문하는 친구들을 손녀는 신기했었다. 그런 해괴한 음식을 손녀의 할머니는 음식으로 쳐주지 않기에, 그런 음식도 아닌 걸 집에 사간다면 반나절쯤 할머니의 잔소리만 옴팡 듣게 될 것이라는 그런 혼자만의 현실적인 상상을 조용히 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아웃백, 빕스 같은 패밀리레스토랑에서 파티를 하자는 친구들 등쌀에 그런 음식을 먹고 집에 귀가를 하더라도 밥을 먹었다는 손녀의 말을 도무지 믿지 않는 할머니는 한나절을 푹 끓인 구수한 시래깃국을 기어이 먹였다. 첫 한 술은 할머니의 강요에 마지못해, 둘째 술부터는 점심의 느끼함 내려보내는 뜨끈한 국물을 게눈 감추듯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밤새 말린 교복 셔츠는 아무래도 여전히 꼬릿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칼 주름 잡힌 새침한 교복 위에 간장 냄새도 덤으로 입고 등교하는 손녀의 발걸음이 무겁다. 반 친구들이 교실에서 냄새난다고 놀리면 어쩌나, 그보다도 이제 칠 반 왕따가 되고 전교에 똥냄새나는 고딩으로 낙인이 찍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먹구름 같은 생각의 늪 속에서 학교에 도착했다.
"우앗, 냄새! 이거 뭐야?"
짝꿍은 질문인지 놀림인지 대차게 손녀를 한 방 먹였다. 남색 교복을 새초롬하게 입고, 새까만 구두를 신은 여고생 모습으로부터 괴리감이 드는 꼬릿한 냄새가 스멀스멀 교실에 퍼지니 친구들, 선생님들도 냄새의 출처를 물으면 쑥스럽게 죄스럽게 대답을 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칠 반 친구들은 한 바탕 까르르 웃고 손녀가 입도 떼기 전에 손녀네 할머니가 간장을 달였다는 얘기를 꺼낸다. 걱정했던 미움과 비난이 아닌, 칠 반 애들의 관심과 호기심이 손녀에게 향했다. 어른이 된 손녀는, 그날의 할머니는 서른 명 넘는 여고생과 선생님에게 웃음을 선물했던 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풉 웃음이 나온다.
그 하루가 끝나고 하굣길은 가벼웠다. 누군가의 미움을 한 톨도 사지 않았으며 누군가의 지독한 놀림이 시작되지도 않았음에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21세기 서울에서 간장을 달여먹는 집이 있다는 것, 그게 손녀네 집인 것으로 탄로가 난 것, 촌스러움을 모두에게 들켜버린 것 등 여태껏 잘 포장해 뒀던 손녀의 어떤 촌스런 치부 보따리가 손쓸 새 없이 쏟아져버린 것 같았다.
한 바탕 안도감인지 체념인지 싶은 생각을 이어나가다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정곡을 찌르는 어떤 수치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퍼붓는 무한한 사랑에는 아득바득 반항하면서도, 알게 된 지 일 년도 안 된 학급 친구들에게는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그런 양면종이 같은 비겁함을 보면서 손녀는 혼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를 깨달은 것이 무색하게 이후로도 꾸준히 그 못난 마음은 자꾸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상충하는 이 두 마음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미워하기도 했다. 스무 해쯤 더 살아온 지금의 그 손녀는 아직도 그 못난 마음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고백을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미련 없이, 거리낌 없이, 미움과 원망의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인생에 살짝 스쳐가는 누군가에게 비칠 자신의 모습에 한 없이 미련을 갖는, 남들은 모르는 마음속 그 치부가 참 쿰쿰하다. 손녀가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언젠가 이 꼬릿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겠지 싶다. 그렇다면 진짜 어른이 되고자 하는 건 실현가능한 꿈인 걸까?
할머니의 꼬릿한 그 간장 냄새는 또렷이 기억하지만, 손녀는 어딘가에서도 다시 맡아본지는 참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