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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엾고 사랑스러운 주정뱅이여, 안녕!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안녕, 주정뱅이~


주정뱅이인 너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 어쩌다 참신하다 못해 약간의 비극적인 냄새가 나는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읽게 되었어. 그리고 그동안 한 번도 꺼내어 불러보지 않았던 주정뱅이인 너를 이렇게 소환하기에 이르렀지. 주정뱅이… 어쩌면 이 말이 너에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아. 사실 넌 그냥 술을 마시지. 주정을 부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주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조였던 나사를 풀리게 하는 술조차도 너의 일상의 경직을 완전히 풀어주진 못했으니까. 그래도 끊임없이 넌 술과 함께 했지. 그래 그랬었지.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게 했어. 이 책이. 이 책 속 작가의 문장들이 가슴에 싸한 알코올처럼 스며들더라.


그가 얼음을 채운 잔을 살짝 흔들었다.
“매초 매초 알코올의 메시아가 들어오는 게 느껴집니다.”

아… 영롱하게 차가운 소주 한 잔이 생각나는 문장이다. 매초 매초 알코올의 메시아가 들어온다. 너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을까?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면서 저녁에 가볍게 맥주 한 잔을 즐기던 너에게 알코올의 메시아가 들어오는 축복을 느낄 틈이나 있었을까? 뭔가 알코올을 대하는 신성함에 있어 너는 마이너스 빵점이 아닐까 싶다. 아주 오래전 기억 속에서 혼자 포장마차를 찾았던 에피소드를 굳이 꺼내 들어야 빵점은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어. 그것도 용기였지. 여자 혼자 포장마차를 간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들었지. 그때 당시엔.  


숲 전체에 깜깜한 어둠이 내릴 때쯤 그들의 정신은 물에 풀린 물감처럼 아득해졌고 그들의 육체는 완전한 모호함 속에 잠겨버렸다. [중략…] “당신은 누굽니까?”

사는 게 그땐 정말 깜깜한 어둠 그 자체였지. 오롯이 알코올의 힘을 빌려야만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어. 그래서 넌 갔지. 깜깜한 어둠의 틈을 타 포장마차로 살며시 스며들었지. 혼자 따른 잔을 연거푸 들이켰고 그 맛은… 아, 아직도 기억나는 듯하네. 꽤 씁쓸했지. 소주병의 모래시계가 거꾸로 빠져나가듯 비워지자 너의 정신은 물에 풀린 물감처럼 아득해져만 갔지. 그래, 주정뱅이들이 좋아하는 그 느낌… 현실이 현실이 아닌 듯, 슬픔도 완전한 모호함 속에 잠겨버리고 오롯이 너의 육체는 이름 모를 나른함에 취하는 거야. 그래, 주정뱅이가 그런 맛에 사는 거지. 바로 이 맛이지. 나른함과 모호함 속에서 드문드문 찾아오는 정신이 너에게 물었어. 넌 도대체 누구니? 넌 왜 사니?


인간은 고통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해내기도 한다.  

맞아. 우리네들은 끊임없는 고통에 노출되어 있어. 그럼에도 우리네들은 그 고통을 또한 감당해내기도 하지. 소설 속 알류커플 수환과 영경처럼, 그 외 인물들처럼. 언제든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단검처럼 지니면서 군데군데 살갗이 터진 오므린 손바닥에 잘못 태운 숯가루처럼 얼룩덜룩한 무채색의 어둠을 간직한 채로. 그러한 고통을 감당해내는 데 알코올이 주는 은혜로움이란 게 또 있는 거지. 그래도 가끔은 투명한 알코올 속에서 책 속의 표현대로 토막 난 기억 속에서 뭔가 징그럽고 보드라운 속살들이 밀려 나오기도 하잖아. 대개는 블루블루하지만, 가끔은 블링블링한 기억들도 떠오르곤 한다고.


고통스러운 표정이 나는 좋다. 그게 진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에밀리 디킨슨 -   

소설 말미에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꽤나 인상적이었어. 대부분의 관계 맺음은 일종의 교환 시스템이라고 했지. 만일 술과도 하나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면, 너의 ‘없음’과 ‘공허함’을 열띰을 지닌 ‘술기운’으로 채우려는 어떤 격렬한 욕망이 술과의 관계를 형성하게 했을지도. 그렇다면 술은 너로 인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찾음. 끊임없이 술을 갈구하는 가련한 고통받는 한 인간의 찾음 속에서 진실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이것도 일종의 사랑의 관계라 불릴 수 있을까?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해 각자의 생이 견뎌질 수만 있다면 괜찮을까? 그 관계로 인해 또 다른 결핍이 삶을 갉아먹을지라도 말야. 주정뱅이 넌 어떻게 생각해?






소설의 제목 [안녕 주정뱅이]가 이상한 여운을 남겼던 이유는. 안녕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만남의 안녕인지, 안부의 안녕인지, 이별의 안녕인지… 중의적인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일생동안 그토록 많은 술을 마셨지만, 한 번도 술을 마시는 나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 단지 마실 뿐,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어야 한다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라는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해설처럼 주정뱅이인 나를 이 소설이 소환해 내고야 말았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

안녕 주정뱅이!


* 사진참조 [알라딘 인터넷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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