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차이나타운, 개항장 거리
일곱 남매 중 막내인 엄마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다. 나를 낳고 남편이었던 사람과 새 둥지를 찾기 전까지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인천에서 보낸 셈이다.
반면 나는 인천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엄마의 지나가는 말이나 혹은 돌잔치 때 찍은 사진이라던지 때때로 그곳의 그림자를 찾아낼 수는 있었지만, 기억 속에 선연하게 그려진 적이 거의 없다.
10대의 중반에 접어들면서 우리 집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엄마의 남편이었던 사람은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어딘가 중요한 자리에서 자신을 뽐내는 것 또한 즐기는 이였다. 그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기혼 남성이 그렇듯 아내에게는 물론 자식에게 또한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렀고, 게다가 여성 편력 또한 있어서 나와 엄마를 힘들게 했다. 그러다 업무 차 알게 된 다른 이에게 연대 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집이 경매에 넘어갔고, 나는 16년 만에 엄마의 고향인 인천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친구가 많지 않았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편견 탓이라기 보단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진로가 음악 쪽으로 확고해졌고, 하교 후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바로 연습실로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누군가와 마음을 터 놓고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졸업을 하고 보니 왜 명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잘 되지 않으나 내가 재학중일 당시만 해도 그 학교는 학생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며 학업 분위기를 이어 나가기로 이름 나 있었고, 나에게 그런 학교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정규 수업 종료 후 시작되는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으려면 학원을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들며 학교 측을 설득해야 했고, 3년간 담임을 맡았던 이들 역시 내게 “공부도 안 하는 게 뭐가 되겠냐”는 모멸감을 선사해 주었기에 성공한 스타들 뒤 ‘학창 시절 나를 지지해 주었던 존경스러운 선생님 이야기’는 그저 아주 먼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미담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약간의 억울함에 사로잡혀 있던 것 같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 곳에서 자유조차 박탈당하는 것 같아 짜증을 내는 날이 많았고, 딱히 모날 이유가 없는 날에도 그냥 화가 많았다. 짠내 나는 곳에서 살기 싫다며 집을 뛰쳐나가기도 했었고, 언젠가 원래 살던 그 집을 되찾는 야무진 꿈을 꾸기도 했었다.
그런 나의 반항은 대학을 서울로 다니면서 점차 사그라들었고, 엄마와 나는 원래 살던 동네는 아니지만 몇 년 후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인천의 모습이다. 그 후 다시 가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지를 선정할 때 딱히 꼽지도 않고, 굳이 누군가와의 약속 장소를 그쪽으로 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1박 2일로 인천을 다녀 올 일이 생겨버렸다. 후지필름과 인천관광공사에서 기획한 출사 프로젝트로, 야간 특화도시인 송도와 인천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는 것. 한 번도 인천에서 관광을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천이라는 도시에 애정 자체가 없는 내가 이번 프로젝트를 해낼 수 있을지 우려가 됐지만, 이번이 아니면 내 어린 날 처연한 꼴로 남아 있는 인천에 대한 기억을 놓아줄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컸다. 게다가 매거진에서 일할 때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한 작가님의 가이드 하에 진행되는 일정이라 야경 촬영에 대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음이 분명했고, 또 후지필름은 나에게 좋아한다는 표현만으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브랜드이다. 다행스럽게도 포트폴리오 심사 역시 통과했다.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인천 차이나타운, 개항누리길과 송월동 동화마을은 도보로 그리 멀지 않은 구역에 있다. 두어 시간 내로 다 돌아볼 수 있는 근방이라 출사 여행의 한 코스로 묶기에도 아주 좋다. 수도권 지하철 1호선인 인천역에서 하차 후 차이타차운 입구로 진입해 먼저 둘러본 후 식사를 하고 개항누리길과 동화마을 벽화를 감상해 보시길. 전동카트를 타고 다니며 해설을 듣는 '개항e지투어'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행되니 이곳의 역사를 조금 더 흡수하고 싶다면 이용해 볼 것.(지대가 조금 높은 편인지라 계단과 오르막이 많으니 특히 여름엔 필수다.) 현재 SNS상에서 야경 명소로 가장 대두되고 있는 송도 센트럴파크는 이 출사 여행 코스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다. 뜨끈한 만둣국 위에 올린 파 고명 같다고나 할까.
차이나타운의 원시는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던 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듬해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현재의 선린동 일대에 정착을 하게 되고, 이후 자연스레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주택과 소매 점포 등을 지으며 본격적으로 상권을 넓혀간 화교들은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곡물과 소금을 수입해 1930년대 초반까지 번영했으며, 청요리로 명성을 얻은 것은 1920년대부터 6·25 전쟁 전까지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공화춘과 중화루, 동흥루 등이 이름을 알린 것도 이때이다. 시대가 흐르며 외환 거래 규제, 무역 규제, 거주 자격 심사 강화와 같은 각종 제대로적 제한으로 화교들이 떠나면서 차이나타운 내 화교사회가 움츠러들었지만 1992년 맺은 한중수교의 영향으로 조금 나아진 추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주춤하는 듯 보였지만 역사가 깊은 거리인 만큼 여전히 인천 하면 많이들 떠오르는 관광 명소임은 변함이 없다.
많은 중식당과 화교들이 거주하는 주택이 몰려있는 청관거리이지만 내가 느낀 이곳의 첫인상은 중국보다는 일본에 더 가깝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채도가 낮은 다홍색에 가깝게 칠해진 기둥과 홍등에서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건물이 연상되었는데, 이러한 느낌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건물의 전체 모습보다는 하늘과 함께 일부분을 담아냈다.
워낙에 유명한 관광지이다 보니 모두의 발길을 멈추게 만드는 포토 스폿보다는 이곳의 정취를 담아내면서도 나만 아는 으슥한 촬영 지점이 있으면 좋겠다 싶다.(모든 사진작가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듯해서 문제이지만) 여기서도 하나 찾았네.
황제의 계단을 올라가면 보이는 뷰. 워낙 인파가 많아서 아무도 없는 모습을 담기가 쉽지 않다.
개항장 거리에는 개항 박물관, 근현대건축전시관, 한국근대문화관, 아트플랫폼 등 한국의 근현대사를 알 수 있는 산물이 가득하다. 1883년 외세의 강압에 의해 개항된 인천은 조선을 발아래 두려는 열강들의 싸움터였다. 일본은 수탈을 위한 하나의 무기로 많은 회사와 은행, 별장, 호텔 등의 건축물을 세웠는데 옛 일본영사관으로 쓰였던 중구청과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이 이에 해당한다. 근현대사의 상처를 딛고 현재는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변화해 많은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개항장 거리에서 포토 스폿으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바로 근대건축전시관이다. 옛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이던 곳으로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내부의 일부분만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성인 1명당 입장권은 500원.
내부에는 여러 전시물이 있지만 개항장 거리의 옛 모습을 재현한 그림이 가장 눈에 띈다.
오래되어 변색된 건물의 벽이 파란 하늘과는 다르게 쓸쓸해 보여 셔터를 눌렀다. 정돈되지 않고, 대칭이 아닌 구도와 외벽이 상한 날것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다.
대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초입에 있는 한 건물. 거리에서 걷다가 골목으로 들어가는 순간 건물 벽에 풍경처럼 매달린 장식을 발견했고, 때마침 빛이 들어오는 모습이 마치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이곳의 단면이 드러나는 것 같아 사진을 찍었다. 역시 광각이 주는 도시의 풍경보다 단면이 주는 찰나가 그곳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해 준다.
¶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302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36
☎ 032-773-3838
매일 11:00-21:00(20:30 라스트오더)
차이나타운에는 백짜장을 하는 집이 많다. 일반적인 짜장은 춘장으로 볶지만 백짜장은 된장으로 볶는다. 백짜장이 궁금해 종업원에게 여쭈어봤다가 된장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도전해 보자며 주문했는데 짜지 않고 진하게 고소한 맛이 올라온다. 옳은 선택이었다.
- 고향의 재정립(2) 편으로 이어집니다.
- 원고에 싣지 못한 B컷은 인스타그램 @play_archive_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후지필름 공식 홈페이지에서 본 프로젝트에 함께 한 다른 작가분들의 멋진 사진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누르기만 하면 원하는 정보를 얼마든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나만 알고 싶은 것은 사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알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진작가에게 촬영지도 마찬가지죠. 제가 기록한 장소가 희귀한 출사지는 아니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덧붙인 시선을 통해 진정한 출사의 맛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맛을 더해 줄 식당 정보는 이번 주말 출사를 계획 중인 당신을 위한 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