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이 뻘뻘
CAP 시험을 준비하며 심리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일반교과. 바로 불어 & 역사 말하기 시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말하기 시험인 데다, 프랑스의 역사는 외국인이 이해하기엔 쉽지 않은 생소한 개념이 많기 때문이다. 주입식 교육이 편한 7차 국민공통과정 세대이자 아무리 언어와 사회가 좋았던 문과생이었던 나라 할지라도 나의 생각을 외국어로 논리적으로 말하는 오럴 시험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6월 15일 오후 1시 30분. 시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시험 순서가 적힌 벽보를 보니 12번 시험장의 1번 순서로 배정되어 있다. 내 뒤로도 5명이 더 있었는데, 시험은 한 사람의 Jury 앞에서 1대 1 방식으로 치러지고 한 사람당 30분 이상 소요되는 걸 생각하면 오래 기다리느니 첫 번째로 시험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대기실에 대기하고 있자 Jury가 직접 수험생 한 명씩을 불러 찾는다. 그렇게 시작된 말하기 시험. 먼저 종이에 서명을 하고 수험표와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혹시 몰라 사전도 꺼냈지만 Jury가 사전이 그다지 필요하진 않을 거라며 대략적인 진행 순서를 알려주었다. 먼저 시작된 불어 말하기 시험. 3분 동안 자신이 하는 일과 관련된 레시피라든가, 작업 내용 등을 최대한 전문용어를 많이 사용해서 말하고 나머지 7분 동안 면접관과 텍스트와 관련된 질의응답을 이어나가는 방식이다. 제과 학교 불어 선생님이 아주 열정적으로 1년 전부터 텍스트를 준비하게 하고 여러 번 모의시험을 치르게 해 준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선택한 주제는 Banoffee 케이크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3분짜리 불어 텍스트를 외워서 PPT도 없이 보조 자료 없이 말한다는 게 쉽지 않은 과제임은 틀림없다. 처음에는 A4 용지를 꽉 채웠던 분량이었지만, 계속 더듬거리며 입에 붙지 않는 단어는 최대한 쉬운 단어로 바꾸고, 불필요한 문장은 과감히 쳐내다 보니 최종 분량은 10포인트 기준으로 A4 종이 반절 정도되는 분량으로 바뀌었다. 물론 다른 프랑스인 학생들에 비해서는 아주 적은 분량이지만 3분을 넘기지 않는 게 점수를 매기는 데 있어 비중도 크고, 최대한 정확하게 의사전달을 하는 게 목적이었기에 적은 분량이나마 발음을 똑바로 하려고 노력했다. 연습은 가끔 생각나면 텍스트를 정독하거나, 통학길에 녹음된 음성 파일을 듣는 방식을 선택했다. 시간 엄수가 중요해서 타이머를 사용하려나 싶었는데, 아날로그 손목시계로 대략적인 시간만 체크해서 부담을 적게 갖고 말하기를 시작했다. 다행히 평소 연습할 때보다 덜 더듬거리고 준비한 텍스트를 빠짐없이 다 말한 것 같다. 말하는 동안 Jury는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말하기 내용을 받아 적으며 전체적인 글의 구조나 질문거리도 찾는 듯했다. 그리고 이어진 질의응답시간. 오븐을 사용하지 않는 케이크가 맞는지, 왜 크림에 마스카포네 치즈를 넣는지, confiture de lait는 무엇인지, 한국의 제과와 프랑스의 제과는 어떻게 다른지 말하기 내용과 관련된 것을 주로 물어보았다. 2년 동안 꼬박 매일매일 만든 Banoffee 케이크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었다. Jury는 제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실 답변의 옳고 그름보다는 구사하는 불어 그 자체의 문법이나 용어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진 역사 시험. 간단하게 역사시험이라고 했지만 역사-지리-윤리과목이 통합되어 있다. 지난 2년 동안 배운 내용들 중 역사에서 2가지, 지리에서 2가지, 윤리에서 4가지 주제 총 8가지 주제 중 무작위로 고른 한 가지 주제에 대해 5분 동안 준비시간을 갖고, 5분 동안 말하고 5분 동안 질의응답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8가지 주제는 다음과 같다.
역사
1. Revolution Nationale - Vichy 정부의 평가
2. 50년대 이후 유럽연합의 형성
지리
3. 교통의 발달
4. 도시의 발달과 과제
윤리
5. 시민권 Être citoyen
6. 안보 Plan Vigipirate (프랑스 대테러 대응 전략)
7. 자유권 liberté
8. 학교 내 정교분리 laïcité
이 8가지 주제는 교육과정에 의거해 거의 매해 비슷하지만 관련 보조 자료는 매번 달라지는 것 같다. 보조자료는 포스터나 캐리커쳐와 같은 그림자료인데, 8가지 주제에 해당하는 보조자료를 시험장에 직접 가지고 가야 한다. 그리고 수험생 개인이 준비한 자료가 아닌 공식자료임을 보여주기 위해 보조자료에 담당 교사의 서명도 꼭 받아서 가야 한다.
말하기 5분 동안은 관련 자료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한 후 관련 지식을 말한 후, 자료에 대한 비판과 결론, 그리고 다른 관련 주제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시험 한 달 전, 역사 선생님은 말하기 텍스트를 모두 정리해 주셨다.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무척 다행이었다. 하지만 8가지 주제를 모두 불어 말하기처럼 다 외우기는 불가능해서 키워드만 따로 정리해서 수시로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했다. Jury가 책상에 뒤집어 놓은 8가지 카드 중 내가 뽑은 주제는 시민권 Être citoyen이었다. 운이 좋은 다른 수험생들은 간혹 Jury가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주제를 선택하게끔 했다는데, 나는 그런 운은 없었다. 하지만 주제 자체는 내가 그나마 쉽다고 여긴 주제여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