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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새해는 이제 시작이야

귤 한 알의 행복

by 불가사리


”엄마, 뭐 먹을까? “


밤 10시 거실에서 놀던 아이가 묻는다. 이미 배가 볼록 나와있는데도 뭔가를 먹고 싶어 하는 아이를 보며, 쑥쑥 크려는가 보다 싶어 성큼 부엌으로 간다. 이제 29개월을 향하는 아이는 못하는 말이 없다. 아이의 말은 대부분 의문형이다. 내가 아이에게 말하는 습관이 그대로 묻어난다. 아이는 매의 눈으로 나를 관찰하고 그 말이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한다. 스펀지처럼 쑥쑥 빨아들이는 아이를 보며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럼 귤 먹을래?”

“좋아! 귤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러시아의 새해 풍경 중 하나는 슈퍼 가득 쌓인 귤이다. 크기도 종류도 다양한 귤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풍경이 이제 놀랍지도 않다. 새해의 상징이기도 한 귤은 1970년대에 처음으로 러시아에 수입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운반하기 편리하고, 추위에 잘 견디며 쉽게 상하지 않는 귤은 러시아인의 식탁에 올랐다. 그리고 1990년대에 러시아에서 귤이 재배되기 시작했는데, 새해 직전에 수확하여 가장 신선한 과일 중 하나였다고 한다. 러시아의 슈퍼에서 볼 수 있는 귤은 전 세계 곳곳에서 도착한다. 세계 곳곳에서 건네는 다정한 인사처럼, 잎사귀로 손짓한다. 심지어 며칠 전 슈퍼에서는 “한라봉”이라고 쓰여있는 귤을 발견하고 두 눈을 의심했다. 주로 ‘아시아에서 온 귤’이라고 쓰여 있어서 러시아와 가까운 중국에서 수입되었나 보다 했는데, 다른 슈퍼에서는 “한라봉”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진짜 한국에서 온 귤일까, 내가 알고 있는 푸른 밤의 제주도, 그 한라봉이 맞을까.


한라봉 귤 1kg에 약 260루블(한화 약 4000원) 다른 귤에 비하여 무척 비싼 편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른 한라봉 하나의 꼭지를 딴다. 아이가 작은 손으로 껍질을 까는 동안 잠시 부엌을 정리한다. 한 알씩 떼어낸 아이는 귤 한 알의 양 끝을 손으로 꼭 잡고 벌린다. 촘촘하게 자리를 잡은 귤 알맹이가 하나 둘 떨어진다. 아이는 귤 알맹이가 여전히 신기하다. 아직은 세상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기분 좋은 29개월, 알맹이를 하나씩 떼어 입을 보는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기분이 좋아졌어? “

”응. 기분이 좋아. 엄마도 기분이 좋아졌지? “


감기와 부비동염으로 지나가버린 너와 나의 한 달,

귤 한 알로 행복할 수 있는 1월의 마지막 밤, 우리의 새해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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