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인가?
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인가? 나의 영어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일단 학교에서 무리 없이 영어 수업과 원어민 관리 업무를 하고 있으니 영어를 어느 정도 ‘하는’ 사람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잘한다’고 하기엔 걸리는 부분이 많다. 물론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눈에는 잘하는 듯 보이겠지만,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원어민이 아니고 소위 유학파도 아니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한국인들 중에도 영어 능력자들이 넘쳐난다. 나는 그 바닥에 명함을 내밀 실력도 아닌 것 같다. 영어능력에 대한 사회적 기대 수준도 높아졌고, 각종 미디어를 통한 노출도 많아져서 이제 대중들도 전문 통역사의 실력을 판단한다. ‘유창해 보이지만 진짜 미국 영어는 아니다’, ‘저 정도 실력으로 통역사를 하다니 사기다’, ‘한국인 억양이 묻어난다’, ‘어학연수 1년만 가도 저 정도는 한다’라는 식이다.
내가 영어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회화능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건 20대 중반부터다. 교대를 다녔기 때문에 일반대생들이 취업 영어를 공부하는 방식으로 영어에 매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3학년 때 임용시험 가산점을 받기 위해 토익시험을 봤는데, 연습 삼아 처음 본 시험에서 가산점 기준을 넘어버렸다. 그래서 토익공부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내신, 수능, 토익점수와 별개로 내 회화능력이 제로에 가까웠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첫 해, 영어 회화 능력을 기르고자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웠다.
1단계- 원어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2단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할 수 있다.
3단계- 영어 농담으로 원어민을 웃길 수 있다.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의 흐름 속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외국에서 어학원을 짧게 다녀봤고,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혼자 틈틈이 연습을 하고, 대학원도 졸업했다. 그 과정에서 내 영어 능력은 확실히 향상되었다. 하지만 그 경로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고, 꿈꿔왔던 모습 그대로의 결과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성장은 오히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발생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귀가 뚫리고, 입이 터지고 자연스레 원어민처럼 듣고 말하게 될 줄 알았었다. 그러나 영어 능력이란 게 듣기에서 말하기 순서대로 향상되지 않았다. 10년이 넘게 흘렀으니 이제 영화나 티브이쇼를 볼 때 자막 의존 비율이 현저히 낮아진 건 사실인데 그것도 장르에 따라 천양지차이다. 코미디나 가족 시트콤 장르는 비교적 쉽고 과학, 정치, 역사 등이 얽히면 훨씬 덜 들린다. 이제 원어민과의 대화 상황에서 대부분의 영어를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1단계 목표를 이룬 건 맞다. 그러나 한국인이 나 혼자이고, 원어민 대여섯 명이 자기들끼리 빠른 속도로 대화하는 상황에서 지금도 방향을 잃는다. 처음에는 어휘와 속도만의 문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는 농담, 공유하는 자국의 문화의 영향도 컸고 그건 연습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주 안에 있지 않았다.
예전에는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은 '내가 하고 싶은 한국말을 영어로 완벽하게 바꿔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예전에 비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원활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하고 싶은 말’ 이란 뜻 자체가 모호해졌다. 예를 들어 누군가 ‘무슨 음식 좋아해? 뭐 먹고 싶어?’라고 묻고, 내가 ‘나는 모든 음식을 잘 먹어’라고 말하고 싶다고 치자. 예전 같으면 ‘I eat every food’라고 했을 거다.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을 했고 상대도 내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한국어로 '나는 다 잘 먹어'라는 말의 뜻은 정말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는 의미라기보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란 뜻에 가깝다. 그러려면 'I eat every food'보다 'I'm not picky'가 훨씬 더 자연스럽고 원뜻에도 가깝다. 어휘를 '아는 것' 이상으로 어휘를 제대로 '선택 및 배치'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여전히 2단계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 중이고 완성된 상태란 없다는 생각을 한다.
당시 세 번째 단계에 '영어로 농담을 해 원어민을 웃기겠다'는 목표를 세웠던 걸 보면 농담을 최고 수준의 언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제 영어로 농담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어 농담이 가능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영어 능력의 향상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일단 나는 국적을 막론해 누구를 만나도 즐겁게 대화하는 편이고, 논쟁적인 주제도 좋아한다. 이건 호기심이 많고, 낙천적인 내 성격의 영향이 더 큰 것 같다. 이런 예도 있다. 내 동생은 영어와 친하지 않고, 영어가 필요한 직업도 아니라 영어 자체에 관심이 없다. 작년에 내 동생과 우리 학교 원어민 교사가 우리 집에서 만나 함께 어울렸다. 내 동생은 자신 있게 모든 말을 한국어로 건넸고 대단히 기초적인 영어 단어들과 번역 앱을 사용했다. 원어민 교사는 내 동생과 대화하는 내내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나는 그렇게 크게 웃는 모습을 학교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원어민 교사에게 내 동생은 굉장한 '퍼니가이'였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인가? 기존의 관점 즉 원어민 같은 억양, 속도, 문법의 정확성 측면에서 내 영어는 평범한 수준일 수 있다. 하지만 수년간 영어 학습자로서, 또 영어 교육자로서 나름의 고민 끝에 나는 이런 기준 자체에 회의를 품게 됐다. 일단 원어민 영어를 이상향으로 놓는 영어 학습은 여러모로 과학적이지 않다. 어떤 연구자료를 뒤져봐도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한국인이 영어 원어민처럼 영어를 사용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전 세계의 영어 사용자 중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기도 하다. 또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강세' 중심의 언어이기 때문에, 강세를 제대로 표현하는 한 내 억양과 발음이 의사소통에 장애가 되지도 않았다.
대학원을 다닐 때 교수들은 물론 대부분 학생이 영어 원어민들이라 힘들었고 이상한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느 날 미국인 친구에게 내 부족한 영어 실력에 대해 한탄했는데 그 친구가 기함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것 같아! 솔직히 너 때문에 민망할 때도 있었어. 너는 영어가 모국어도 아닌데 나보다 더 지적으로 영어를 써서 자괴감이 들었다고.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정신 차려!" 그 친구는 한국 억양 때문에 오히려 내 영어가 더 특별하게 들린다고도 했다. 소위 본토 억양을 선망하는 한국 문화에서 비춰볼 때 신선한 반전이었다. 심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보너스 같은 만족감과 격려가 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훌륭한 언어의 기준은 '원어민에 가까운 스피드와 정확성'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언어, 배려와 품위, 진실한 감정을 담은 언어란 생각이 든다. 수년 전 미국영화협회(American Film Institute)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영화 대사 100개를 조사해 밝혔다. 1위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1939)' 후반부, 자신을 붙잡는 스칼렛에게 레트가 건넨 말이다.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솔직히 말하면, 내 알 바 아니오).
(I don't give a damn, I don't give a shit 이라고도 많이 한다. 직역하면 나는 하찮은 것도 주지 않는다, 즉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라는 뜻이다)
1939년 미국에서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됐을 때 관객들은 'damn'이라는 단어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시대상과 문화의 기준에서 보면 너무도 상스러운 표현이었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맥락, 인물의 감정, 장대한 스토리의 대미와 그 대사는 너무도 절묘하게 어울렸고 결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대사 중 하나로 남았다. 하지만 만약 영화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길을 걷다가 실수로 낯선 행인의 발을 밟고 화가 난 상대에게 'Frankly, I don’t give a damn'이라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상황이 곱게 마무리되지는 못할 것 같다. 이 대사가 멋진 이유는 이 쉽고 간단한 단어들이 멋진 영화 속에서, 적절한 맥락과 감정을 담아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대사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언어가 그렇다. 중요한 건 상황과 맥락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향을 발휘하는 언어의 기반은 배려, 품위, 진실한 감정 등에 있다. 타인의 존재를 배제한 채 오로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언어란 없다. 언어는 이미 결정된 정확한 경로를 누가 더 짧은 시간 안에 관통하는지 경쟁하는 달리기 경주가 아니다.
나는 이제 내가 영어로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나는 영어를 가르칠 수 있고, 학교에서 주어진 관련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영어를 배우면서 문화적 편견에서 벗어나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자막에 없는 언어들을 캐치하며 영화를 더 깊이 감상하고, 내가 관심 있는 밴드나 예술작품들을 외국 사이트를 통해 검색하면서 다양한 관점을 접하기도 한다. 나는 영어 학습자로서 또 교육자로서, 그간의 경험과 생각들을 표현하는 글을 계속 쓸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 특히 우리 학생들이 원어민 이데올로기 때문에 학습의 방향을 잃거나, 경쟁에 매몰되거나, 열등감에 몸부림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기능적인 측면에서도 영어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할 테지만 결코 원어민처럼 되기 위해서는 아니다. 더 정확하고 사려 깊은 의사소통, 언어를 통한 세계관의 성장, 시민교육의 일환으로서 외국어 교육에 보탬이 위해서다.
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인가. 내 영어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내 영어를 의미 있는 방향으로 쓸 자리를 찾았고 부족하지만 계속 성장 중이다. 그래서 내 영어는 빛난다. 모두의 영어가 빛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