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역량의 창조

by 김현희

내가 있는 초등학교에는 영어를 좋아하고 잘하는 학생들이 많다. 6학년 학생들 중에서 의사소통능력은 물론 나이 대비 상당한 수준의 작문 실력을 갖춘 학생들도 꽤 있다. 교과서 형식을 그대로 따르는 수업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비슷해 보인다. 듣고 따라 말하기, 단어 쓰기, 주어진 형식에 맞춰 짧은 글쓰기, 복습형 게임의 형식에 갇히기 때문이다. 재작년부터 나는 학생들이 온라인에 직접 글을 쓰고, 서로 댓글을 쓰는 활동을 자주 구성했다. 자신이 쓴 내용을 교사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볼 수 있게 해서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내며 소통하려는 욕구를 자극하고 싶었다. 교실에서 조용하게만 보였던 6학년 학생들의 다양한 성향, 예술적 취향, 작문 능력 등을 '발견'하게 된 건 그와 같은 활동을 통해서였다.


논리적이고 재치가 있으며 영어 글쓰기 능력이 눈에 띄게 좋았던 한 학생이 2학기 마지막 수업 시간에 내게 이런 쪽지를 남겼다. “중학교에서 문법 지옥에 빠지기 전에 마지막까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우리 학교 6학년 학생들이 중학교 내신 준비를 위해 학원에서 어떤 문제집을 풀고 있는지 잘 안다. 이런 아이들이 왜 영어 역량을 즐겁게 발전시키지 못하고 영어 학습을 지옥처럼 느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제 한국에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은데 '영어를 잘한다는 것'의 의미는 뒤죽박죽 불분명하다. 교사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수준의 아이가 문법 위주의 내신평가 때문에 곤란에 처하고 반면 내신, 수능, 토익 등의 고득점자 중에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능력이 낮은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려면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떠들기부터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물론 나도 도전의식과 자기 틀을 깨고 나오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어는 자신감!'이란 구호를 시간과 장소, 듣는 이의 처지와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해도 된다는 언명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길에서 외국인을 보면 무턱대고 다가가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걸 영어 능력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며 난감하거나 민망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영어교육이 시작된 지 15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지출한 시간과 노력을 고려하면 한국인들의 영어 능력은 임계점에 도달했다고도 볼 수 있다. 각종 영어 학습 방법과 노하우, 영어교육 관련 사회 인프라 역시 과잉상태다. 인공지능의 진화로 간단한 수준의 영어 대화는 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할 만큼 기술도 발전 중이다. 이제는 영어 능력 향상을 위한 기계적 전진을 멈추고, 역량의 균형 있는 분배, 역량을 재정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당연시했던 기준들에 의문을 품고, 존재하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에 눈길을 주는 작업 말이다.


영어역량을 해석하는 기준


1-기능적 해석


영어를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기능의 통합으로 보고 이 기능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구사하는 사람이 좋은 능력을 가졌다고 보는 가장 오래되고 흔한 관점이다. '누가 더 많은 어휘를 알고 있는가?', '누가 더 빨리 글을 읽고 해석하는가?' 등의 정량적 해석법은 스포츠 혹은 과학 기술의 관점과도 유사하고, 각종 표준화 시험은 이 기준을 따른다. 영어를 비롯한 언어를 의사소통의 '도구'이자 의미를 실어 나르는 '그릇'이라 보기 때문에 가치중립적인 해석으로 보기 쉽다. 하지만 언어가 권력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진실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이고 허구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1883년 관립 외국어 교육기관인 동문학에서 영어교육이 처음 시작된 이래 한국의 주류 영어교육은 기능적 언어관을 벗어난 적이 없다. 구한말 조선인들에게 영어는 출세와 성공을 위한 기능이자 도구였고, 국가는 서양문물을 수용하고 배워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영어교육을 실시했다. 1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조선인들이 벼슬을 하기 위해 영어를 배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어는 입시와 취업을 위한 관문이다. 국가 교육과정은 영어를 통해 타국의 문화를 익히고 우리의 문화를 세계로 확장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영어가 글로벌 무대의 주요한 '무기'라고 가르친다. 지금도 수많은 영어교육 현장에서 은연중에 '진짜' 미국식 혹은 영국식 영어를 강조하고 원어민 수업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영어능력을 기능적으로만 해석하는 한, 우리는 원어민 중심주의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의 영어 능력을 기능면에서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인의 평균 신체조건을 가진 내가, 신장 194cm에 발이 유난히 큰 수영 선수 마이클 펠프스와 자유형 경기를 벌여서 이길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것과 같다. 영어 '기능' 즉 정확성과 스피드, 유창성 등에만 방점을 둘 경우 EFL 환경의 학습자들은 영어 원어민처럼 될 수 없다는 불안과 열등감, 자기 소외에 빠질 위험이 다분하며 실제로 한국의 많은 영어 학습자들이 그와 같은 현상에 시달린다.


2-정치적 해석


전직 미국 대통령 도날드 트럼프가 혐오 발언을 할 때마다 혐오범죄가 8%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나 정체성과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고, 사회에 끼치는 영향 역시 막강하다. 대단히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외국 사이트 댓글창에 외국인, 여성, 장애인, 소수자, 노인, 빈곤층을 향한 혐오 발언을 일삼는 한국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영어 역량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국가 간의 경계는 어느 때보다 낮아졌고, 젊은이들의 영어 능력은 어느 때보다 높은 지금, 외국인이나 소수자를 향한 혐오, 젠더 갈등, 계급 격차 등은 왜 줄어들지 않고 있을까?


영어 역량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어떤 언어가 인간의 존엄함을 일깨우고, 감수성을 고양하고, 사회 정의 실현의 측면에서 긍정적인지, 어떤 언어가 미래 세대에게 더 가치로운지 평가하고 싶어 한다. 일전에 내 동료인 원어민 교사와 함께 방탄소년단의 UN 영어 연설, 영어 방송 인터뷰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리더 RM의 영어 능력은 대단히 우수하지만 가끔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도 쓰고 당연히 한국인의 억양도 묻어난다. 하지만 당당하고 힘찬 메시지, 자신감 있고 여유 있는 태도에서 그가 지적이고 진실한 사람임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뛰어난 영어 능력과 긍정적인 에너지에 고무되어 내 동료인 미국인은 오늘도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유색인종인 여성 하원의원들에게 "부패한 당신들의 나라로 떠나라"라고 조롱했던 도널드 트럼프는 영어 기능 면에서 RM을 앞설지 모른다. 하지만 "젠더 정체성, 인종, 국적, 나이와 상관없이 너 자신에 대해 말하라"라고 연설했던 RM에 비해 그의 언어가 정치적으로 더 가치롭고, 사회 정의 실현에 부합하며, 미래 세대에게 유익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영어 능력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교육의 사회적 책임과 가능성을 제고하게 한다. 현재 초등학교 영어 교과서는 물론 고등학교 교과서의 글 역시 사건의 나열과 설명 위주이고, 정서적 어휘가 결핍되었으며, 진정성이 결여되었다(1). 여전히 영어 교육 현장은 어휘와 문법 구조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언어의 형식에 초점을 맞춘다. 학생들이 텍스트에 참여하고 몰입하게 하는 것보다 일방적인 의미 해독에만 중점을 둔다. 영어 역량을 정치적 맥락으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여 언어를 단지 도구로만 보는 한국 언어교육의 실태를 드러낸다. 영어교육이 시민교육의 연장선에 있지 못하고 단순한 기능 교육, 서열화의 첨병으로만 작용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점을 직시하도록 한다.


3-내적역량과 결합역량의 균형


한 학생이 미국에서 2년간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6학년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그 학생을 '영어의 신', '미국인' 등으로 부르며 그 학생의 영어 능력에 대한 기대를 표출했다. 그 학생은 실제로 영어 능력이 굉장히 높았고 귀국 후에도 미국 학교에서 사귄 친구들과 자주 통화를 했다. 하지만 영어 시간에는 매우 조용했고 기회를 주더라도 절대 한 문장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글쓰기 활동에서조차 내가 제시한 예시문의 형식을 단어만 바꾸고 그대로 따르곤 했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흔히 '10년 이상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도 제대로 된 영어 한마디를 못하게 하는 한국식 영어 교육'을 비판하는데 사실 교육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이란 나라의 언어적 환경이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지만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 게 문제라기보다, 실제로 한국에서 살다 보면 영어를 한마디도 쓸 일이 없다(물론 한국의 언어 환경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고유한 현실이다). 앞서 예시한 미국에서 온 학생의 경우에도 학생의 역량 자체는 뛰어나지만 주위 환경이 그 학생의 내적역량이 기능할 기회를 주지 못하는 형편이다. 한국 학교 교실이라는 공간적 차원의 문제와 함께 또래 집단 내에서의 압력과 부담이란 것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만해도 외국인 친구들과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지만, 교실 학생들 앞에서는 짧은 영어도 잘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처음에는 내가 원어민이 아니기 때문에 조절이 어려운 걸까 싶었는데 원어민 보조교사들을 관찰해봐도 그들 역시 학생들 앞에서는 매우 단순한 영어만 구사하거나, 답답할 때는 오히려 자기도 모르게 언어보다 몸짓을 사용하고 있었다. 교실 환경, 학생들의 다양한 수준, 한정된 수업 시간 등이 언어 사용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역량에는 내적역량과 결합역량이 있다. 결합역량은 한 사람의 내적역량에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을 더한 개념이다(2). 예를 들어 인도는 법적으로 시민들에게 정치 참여를 보장하지만, 인도인들은 제대로 정치 참여를 하지 못한다.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보건, 의료, 교육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인도 사람들에게는 정치 참여의 내적역량은 있지만 결합역량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한국인들의 영어 역량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개인들이 영어의 내적역량을 갖춰도 한국 특유의 언어 환경, 교육 환경, 평가 형식의 제약 등으로 결합역량이 갖춰지지 않아, 내적역량을 활용할 기회가 없고, 그래서 결국 내적 역량을 망실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한국이 영어권 국가들 혹은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많이 사용하는 유럽의 일부 국가들처럼 언어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건 가능하지도 않다. 하지만 환경의 차이를 무시하고, 언어 능력을 오로지 개인의 내적역량으로만 제한하는 현재의 방식은 분명 문제이다. 영어 원어민 혹은 영어권 국가로 이민을 간 사람들만큼의 능력으로 설정한 교육목표의 한계와 폐해 역시 지적하고 싶다. 역량의 질적인 측면을 고려하고, 한국 특유의 상황에 맞게 결합역량을 재조정하고, 개인의 선택권과 자유의 확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언어의 목표는 달리기 경주와 다르다. 각자의 결승선은 제각각이고 역량은 쉽게 측정할 수 없다. 정확성과 유창성은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와 별개로 외국어가 주는 모호함 속을 헤매어 보는 건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이다. 영어 역량을 키우는 과정은 언어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것과 같고, 감각을 기르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다. 외국어가 선사하는 성장의 경험을 중심으로 역량을 재창조한 세계에서 원어민과 비원어민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지구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모국어의 제약을 인식하고, 언어가 주는 한계와 자유를 끝없이 딛고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과제다.


* 글 제목은 마사 누스바움의 책 '역량의 창조'에서 따왔다.

* 참고도서

(1) 영어교육의 인문적 전망, 김길중 외, 2014,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 역량의 창조, 마사 누스바움, 2015,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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